삼탄박물관에 왔습니다
2014.08.10 16:39
광부들의 고생도 느껴지고요.
급여명세서가 있는데,
90년도 월급이 170만 ~ 250만 정도 (세전)
88년도는 60만원 정도네요
코멘트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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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솔
08.11 14:08
무슨 일이 있었길래 2년 만에 급여가 서너배로 뛰었을까요? -
hyperaesthetic
08.11 16:16
저도 그게 궁금하고... 90년대에 저정도 받으면 적게 받은것은 아닌거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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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노동자 대투쟁의 결과가 아닐까 싶네요. 가장 격렬한 투쟁을 벌인 직종 중 하나가 광산노동자였다고 하는군요. 여담이지만, 저 시기의 광주는 최루탄 냄새를 매일 맡으며, 오늘날 야구경기 보듯이 매일 데모를 봐야하던 시기였죠. 정말 매일 한거 같은 기분이예요.
http://mulumhistory.blogspot.kr/2013/10/1987.html
강원도에도 대투쟁의 열풍이 불어닥친다. 광산노동자들의 투쟁이 7월 중순에 태백에서 시작된다. 기름 사용을 늘리고 석탄 사용을 줄이는 정부의 정책과 어용노조의 횡포 속에서 최악의 노동조건을 강요당해온 광산노동자들의 분노가 걷잡을 수 없이 터져 나온다. ‘막장 인생’ 광산노동자들은 처음부터 국도와 철도를 점거하고 가두시위를 벌인다. 한성광업소 노동자들은 경찰의 봉쇄망을 돌파하고 KBS 태백방송국으로 진출하다가 전경들과 대치하여 새벽까지 공방전을 벌인다. 광산노동자들의 투쟁은 한성광업소 투쟁을 기점으로 전국으로 확산된다. 8월22일까지 강원 45개소, 경북 7개소, 충북 3개소, 충남 5개소, 전남 2개소 등 62개 탄광이 투쟁에 들어간다. 이로 인해 도로와 철도 점거는 더욱 빈번해지고 투쟁은 임금인상 요구에서 도급제 폐지와 어용노조 퇴진으로 발전한다. 투쟁이 벌어지면 가장 먼저 어용노조 사무실이 부서져나간다. 장성광업소 노동자들은 노조사무실을 박살내고 관리자아파트를 불지른다.
http://www.pssp.org/bbs/view.php?board=journal&category1=84&nid=3760
"올 봄에 광산노련은 광산노동자 최저생계비를 약 44만2,000원 정도로 책정했다. 이는 고기라든지 과일은 거의 들어가 있지 않고 술도 소주로만 계산하고 한달 술안주 값을 5천 원으로 계산한 그야말로 최저수준의 생활비였다. 올해 한국노총은 4인 가족 최저생계비를 약 49만원으로 책정했는데 물가도 비싼 광산이 49만원이라는 것은 납득하기 어려운 액수였다. 한편 광산노련은 86년 광부의 평균 임금을 39만 5천 원으로 계산했는데 이는 고급 관리직, 사무직도 포함 한데다가 상여금과 장학금까지 합친 다소 과장된 액수였다. 실제로 대부분의 광부는 피로와 재해로 인한 결근으로 이보다 훨씬 적게 받고 있지 않는가?" (『광부의 함성』제3호)
광산노동자들의 요구가 무리라고 생각할 사람은 없었다.
(중략)
광산 노동자들은 노동자들을 배제하고 회사와 어용노조 간에 임금인상안을 합의한 데에 항의했다. 13% 인상을 관철하겠다고 '스스로 떠든 말도 어기는 사기노조, 노동자들의 가장 큰 관심사인 임금인상을 노동자 모르게 슬쩍 처리해 버린 도둑노조, 엄청난 조합비를 떼어먹고 냄비, 수건이나 나눠주는 수건노조, 냄비노조'를 바꾸자는 요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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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초보
08.12 06:48
87년도는 정말 시위가 많았죠.. 89년.. 즉 87학번이 학부 3학년이 되는해 1학기에.. 87학번이 중간고사란건 처음 본다 라고 했으니까요. ㄷㄷㄷ 그렇지만 그건 일반인의 눈에 그렇고요.. 학내에선 84-86년이 더 뜨거웠던듯 합니다. 84년엔 전경이 아예 학내에 공식적으로 진출해 있었고, 85-86년엔 비공식적으로 끼어있었지요. 거의 누구나 저거 ㅉㅅ야 라고 알아볼 수 있었지만, 잘 알아보기 쉽지 않은 경우 (책장사/테이프 장사/교직원 등등)도 많았었지요. ㅈㅌ수위 란 말도 있었으니까요. 그래서 괜히 군화 신고다닌다는 이유만으로 의심받는 사람도 있곤 했었고요. 학교에서 늦게까지 공부하다가, 아무 이유없이 근처 (동양최대) 서울대 파출소까지 맞으면서 끌려갔다가 몇시간 있다가 풀려나는 것도 흔히 있는 일이었죠. (10시/10시반/11시 세번, 대학본부에서 근처 지하철 역까지 데려다 주는 학교버스가 있어서 그거 맞춰서 도서관에서 공부하곤 했답니다)
학생들이 아크로에서 집회한다고 아크로에 장미를 잔뜩 심어놓는 짓을 하는가 하면.. 새벽에 학교갈땐 멀쩡하니 들어갔다가 전경이 앞뒤 교문을 폐쇄해버리는 바람에 집에 못가기도 하고. 그러다가 개구멍도 배우고.
우리나라를 뜬지 오래 되어서 지금은 모르겠지만, 당시에 친구네 온 가족이 연탄가스 중독으로 병원에 실려간 적이 있었는데, 그때 벌써 서울 시내 병원들엔 고압 산소 치료기가 없어진 지 오래 되어서 제때 치료를 못 받아서.. ;_; 없는 사람은 이래 저래 살기 힘든 곳이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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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둥
08.12 10:42
후후후.. 나이 인증들을 하고 계시네요.
초,중,고 단 한 번도 땡땡이라는 것을 모르던 저도 대학에서 담을 넘었습니다.
월요일 아침이면 주말동안 물청소를 해서 깨끗해진 출입문을 통해 학교에 갔다가 그 날 오후부터 최류탄을 마시며 일주일을 보냈죠.
그나마 교문으로 나올 수 있으면 다행, 정후문 할 것 없이 대치중일 때에는 별수 없이 담을 타야 했지요.
격동의 시간이었습니다. 지금은 제 아이들 사회책에 기록된 사건이 되었답니다.
지금 우리 곁에 일어나는 일들이 10년 20년 후에 무어라 기록될까요?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아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