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터법에 대한 생각이 바뀌고 있습니다.
2018.02.04 01:48
저는 그저 주입식 교육만 잔뜩 받은 공대생이었기에,
미터법이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미터법이 아닌 것은 잘못되었다는 생각을 해 왔습니다.
그래서 노무현 전 대통령의 미터법 제도를 매우 지지해 왔습니다.
하지만 요즘, 미터법에 대한 생각이 바뀌고 있습니다.
미터법은 현실세계에서의 경험을 떼어내는데 일조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가령, 고기 한 근의 무게를 생각해 봅시다.
한 근은 한 사람이 배부르게 먹을 수 있는 양으로, 고기 한 근은 600그램이고 과일이나 채소 한 근은 375그램입니다.
서로 무게가 다릅니다. 복잡하긴 한데...
한 근의 의미는 '한 사람이 배부르게 먹을 수 있는 양'입니다.
배부르게 먹는데 미터법이 필요한가요? 아닐겁니다...
고기 600그램을 먹든 375그램을 먹든 배부르면 그걸로 족합니다.
이걸 굳이 미터법으로 바꿔서 600그램으로 고정시켜두면, 거기서 근의 의미는 사라집니다.
그저 600그램이라는 미터법 단위로 바뀌게 됩니다.
배부르게 먹으려면 얼마나 먹어야 하는지 모르게 되어요.
먹는건 그렇다 치고...
'길'이라는 단위가 있습니다. 이건 사람의 키 만큼의 길이를 의미하는데, 보통 물 깊이를 측정하는데 썼었죠.
물 깊이가 한길 넘는 곳에 들어가면 빠져 죽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한길은 183cm인데, 이런게 중요한가요? 아닐겁니다.
"열길 물 속은 알아도, 한길 사람 속은 모른다." 느낌이 오지요?
그런데 이걸 미터법으로 바꾸면
"1.83km 물 속은 알아도, 183cm 사람 속은 모른다."
... 뭐 어쩌라고..... 이런 소리밖에 안 나옵니다.
183cm에서 사람 키를 떠올리기가 너무나도 어렵고
1.83km에서 사람 키의 열배를 떠올리기가 너무너무 어렵기 때문입니다.
우리 조상들은 183cm정도의 길이를 사람 키라고 생각해서, 쉽게 생각할 수 있도록 단위를 발전시켜 왔었구요.
한 가지 예를 더 들면, 척 또는 자 라는 단위가 있습니다.
흔히 한뼘이라고 하는 단위인데, 법정으로는 30.3cm입니다.
A4용지의 긴 면의 길이는 29.7cm인데요, 이게 29.7cm이라고 하면 안 와닿습니다.
그런데 이걸 한척 또는 한자 (한뼘)보다 아주 약간 작다고 말하면 금방 알아요.
굳이 자가 없어도 대략적인 크기를 알 수 있다는 겁니다.
물론 수학을 계산할 때는 정확한 수치가 필요할 수 있는데,
일상생활에서는 그런게 필요 없잖아요.
한근이 600그램인걸 알아야 하나요? 판매하는 사람이 법정 그램수를 정확히 알고 지켜서 팔면 되는 일입니다.
서양에서도 비슷한 논의가 있었는데요
가령 1파운드는 손에 쥘 수 있을 정도의 무게
1스톤은 돌 하나의 크기
1펄롱은 숨이 찰 때 까지 달릴 수 있는 거리입니다.
모두 상당히 비과학적인 단위라 생각할 수 있는데,
일견 직관적입니다.
우리 조상들의 지혜가 깃들어 있는 단위고요.
각각의 단위에 대한 미터법상의 정의가 있습니다.
그런데 미터법으로 보면 도무지 이 수치가 의미하는게 무엇인지 알 수 없습니다.
미터법은 그저 이론의 세계에서 살고 있는 단위일 뿐이니까요.
미터법이 일상생활 깊숙히 들어온 현상은 과학 만능주의의 산물이 아닌가 싶습니다.
미터법 중 그램의 정의를 보면... 1그램은 4℃의 물 1cm³의 질량이라고 나옵니다.
..... 그래서 뭘 어쩌라고... 하나도 도움이 안 됩니다.
미터의 정의는 더 심한데, 진공에서 빛이 1/299,792,458초 동안 이동한 거리입니다.
초는 더 이상한 정의를 가지고 있는데,
절대 영도에서 세슘-133 원자의 바닥 상태 (6S1/2) 에 있는 두 개의 초미세 에너지준위 (F=4, F=3)의 주파수 차이의 역수
라고 합니다.
어쩌라는건지.... 이게 느껴지시나요? 저는 그냥 후쿠시마 생각밖에 안 납니다. 세슘 특산지니까요.....
이론때문에 실생활에서의 휴리스틱이 완전히 박살나고 있습니다.
혹자는 미터법을 기반으로 휴리스틱을 만들어라(=미터법을 익숙하게 느끼도록 행동하라)고는 하는데,
저는 아직까지도 미터법이 안 와닿습니다.
반면에 그냥 '열길 물 속은 알아도 한길 사람 속은 모른다'쪽이 훨씬 와닿습니다.
애당초 미터법은 현실세계와 별 관계가 없는 단위니까요.
정말 부자연스러운 단위.
이론과 경험.
경험에서부터 이론이 나옵니다.
이론은 경험을 추상화시킨 개념에 불과한데요,
과학만능주의가 세상을 지배하게 되면서 이론이 경험을 지배하려는 현상이 나타나지 않나 싶습니다.
꼬리.
그래서 우리나라의 도로명주소도 잘못된 체계라 생각합니다.
도로명주소는 서양에선 오래전부터 널리 사용하고 있는 체계인데, 그들 조상의 사고방식에 적합한 구조입니다.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동'의 개념이 사용되어 왔구요. 물론, 처음부터 지금의 '동' 개념이 있었던건 아니지만
오랜 역사를 거치며 동의 개념이 꾸준히 개정되어왔습니다. 우리의 문화에 알맞도록.
그걸 한방에 날려버린게 도로명주소. 저는 아직도 도로명주소로 바꾼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목동이 아닌 동네가 왜 '목동중앙대로'인지. 바뀐지 10년이 다 되어가는데 아직도 전혀 적응이 안 됩니다.
도로명주소에 동이 포함되면 그게 도로명 주소입니까.. 도로명 주소의 탈을 쓴 동주소입니까...
우리가 사는 세상은 미터법으로 구성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을 해석하는 방법 중 하나로 미터법을 사용할 수 있을 뿐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사는 대한민국은 도로명주소로 구성되지 않았습니다.
강남이면 강남, 연남동이면 연남동, 이처럼 동네로 구성되어 왔습니다.
도로명주소는 '그들', 즉 서양인들의 역사 속에서 구성되어온 체계였습니다.
그걸 억지로 대한민국의 문화에 끼워 맞추니.. 시행 10년이 된 지금도 전혀.... 와닿지 않을겁니다.
우리나라는 애당초 도시의 구성이 동네를 기준으로 되어 왔으니까요.
지번주소가 싫었다면 지번주소를 개정하면 됐을 일입니다.
코멘트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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똘이아빠
02.04 0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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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LPHY
02.04 11:54
제 말도 비슷한 맥락입니다.
고기 한 근 = 600그램으로 법정규격화 하자는 이야기입니다.
한 근이라는 휴리스틱한 단위 (배부르게 먹을 수 있는 양)가 없어지니
1인분이라는 요상한 단위가 생겼고, 그게 150그램이니 200그램이니 난리가 나는겁니다.
1인분과 한 근은 둘 다 휴리스틱 단위입니다.
다만 한 근은 법적으로 말살시켜버린 단위일 뿐이죠..
고깃집에서 고기를 반근, 반의 반근 단위로 팔면 충분하지 않겠습니까?
배가 좀 덜 고프면 반의 반근 먹고, 많이 먹고 싶으면 한근 먹고. 그러면 될 일이 아닐까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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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준용군
02.04 03:57
말씀하신 내용은 구구절절 공감합니다.
허나
단위라는 셈법이 단일화 되지않고 난잡하면 그만큼 슈많은 규격과 비생산적이고 비효율적인 부가 자원 낭비를 불러 오겠죠
지금은 2018년 입니다. -
SYLPHY
02.04 11:59
미터법이 효율성을 증대시켜주지는 않습니다.
그러면 미국, 영국, 프랑스처럼 미터법을 안 쓰는 나라는 선진국이 아니어야 해요.
(미국은 공식적으로 미터법을 안 쓰고, 영국과 프랑스는 미터법 쓴다고는 하는데 가보면 별로 안 쓰는듯 합니다.)
미터법이 생산성을 저하시킬 수 있다는 주장입니다. 아니, 저는 미터법이 생산성을 저하시킨다고 생각해요.
'열길 물 속은 알아도 한길 사람 속은 모른다.' 이건 직관적으로 무슨 말인지 딱 오죠.
하지만, '1.83km 물 속은 알아도ㅡ 183cm 사람 속은 모른다.' 이건 전혀 감이 안 옵니다.
애당초 미터법이 사람의 직관과는 전혀 관계 없는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1미터는 절대 영도에서 세슘-133 원자의 바닥 상태 (6S1/2) 에 있는 두 개의 초미세 에너지준위 (F=4, F=3)의 주파수 차이의 역수인데,
이게 우리 생활과 무슨 관계가 있단 말입니까. 저기 일본 후쿠시마와는 관계가 좀 있긴 할텐데...
단위가 난삽하냐와 미터법도 관계는 없습니다.
법정으로 척, 촌, 근 과 같은 단위를 규정하면 됩니다. 0.1척, 0.01촌, 0.5근 이런 단위, 충분히 쓸 수 있잖아요.
그 기반으로 미터법을 쓰는 것(가령 한 근 = 600그램)이 더 적절하지 않나 싶습니다.
파운드는 한 손으로 쥘 수 있는 만큼의 무게입니다.
얼마쯤 될까요? ^^ 453그램입니다.
시장에서 대충 500그램정도 과일 사 오면 집 도착하면 손가락이 아픕니다.
1파운드는 그 정도의 양인데요.. 미터법을 쓰면 도무지 감이 안 오더랍니다.
저는 미터법을 획일적으로 적용하는건 과학 만능주의의 산물이라고 생각해요.
미터법을 사용해야 할 이유는 별로 없습니다.
왜냐하면 미터법이 할 수 있는 일은 과거의 단위를 보정하면 할 수 있기 때문이구요. (단위의 지역성을 없애고 통일)
하지만 미터법을 사용해서 잃은 것은 많습니다.
직관적으로 이 길이가 어느 정도 되는지, 그 감각을 날려버리기 때문이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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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loteer
02.04 21:53
아예 옛날 단위로 통일할 수 있다면 그럴지도 모르겠으나, 옛날 단위법과 미터법을 섞어 쓰다 문제 터진 일은 영미권에선 흔하지요.. 유명한 건 미국이 화성 오비터를 해 먹은 거지만, 선박이나 비행기 등 다른 큼직큼직한 것들도 임페리얼이랑 메트릭 섞어쓰다가 버린 사례들이 있습니다. 캐나다도 당했고 호주도 당했고요..
옛날의 단위법이 메트릭보다 직관적인 경우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단위 변환을 하기 시작하면 아무래도 미터법처럼 깔끔하게 변환되지 않고 곱해줄 상수들이 더 많아지는 경우가 많고, 그런 문제를 어찌 잘 회피한다고 해도 다른 나라들과의 국제무역을 위해서는 결국 메트릭 시스템이 공존해야 하는데 그러면 한국도 추가적인 단위 변환을 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사고를 더 자주 겪을 수 있습니다..
물론 이런 사고가 역사에 도움이 되는 경우도 있기는 합니다. 대표적으로 콜롬버스가 지구를 한 바퀴 돌아 인도로 갈 수 있다고 생각했던 이유는 단위변환을 잘못한 탓이었지요..
마지막으로, 과연 기존 단위가 정말 더 직관적인지도 질문할 수 있겠습니다. 예를 들어 화씨같은 경우 0도는 얼어죽고 100도는 더워 죽을 온도 (..) 라고 생각하면 된다는데, 제 기준으론 그거보다 섭씨 온도 알려주는 게 더 직관적이거든요. 섭씨랑은 오래 같이 해 왔지만 화씨랑은 그다지 알고 지내지를 않았기에. 마찬가지로 근을 모르는 사람에게는 근으로 무게를 알려주는 것 보다 100 그램 단위로 고기를 재는 게 더 익숙할 수도 있을 겁니다. (실제로 저는 1근이 얼마나 많은 양인지 그다지 감이 오질 않습니다.. 뭐 쿼터 파운더 이런 건 대충 감이 오는데요.) 근으로 바꾼다고 고깃집이 무게 장난을 안 할거라는 보장도 없고요. 뭐 1인분이라 해두고 밑에 작은 글씨로 1/5근이라 적어두지 않을까요 (..) 모니터 같은 경우에도 인치법이 센티보다더 크기가 잘 감이 오기는 하는데 인치법이 뭔가 대단히 모니터 크기 계산에 잘 특화되어 있어서 그렇게 느껴지는 건 아니지요. 옛날부터 알던 단위라 그럴 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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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색주
02.04 12:17
도로명 주소는 일부 시스템의 경우 도로명 주소로 해야만 기능하기 때문이랍니다. 준비는 오랫동안 탁상공론 식으로 하고 실제 적용은 개판으로 한 것이 도로명 주소입니다. 이거 하느라고 은행에서도 죽어났는데 아무도 관심이 없고 욕만 많이 해서 담당자만 죽어나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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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LPHY
02.04 12:25
외국 연동 시스템이 도로명 주소를 원하는게 있는건가요?
국내 시스템은 의지의 문제이지, 도로명 주소를 반드시 써야 하는 경우는 없을것 같구요.
사실 연동을 요구하는 그 시스템이 일상생활에 매우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지 않으면
해당 시스템을 고쳐야 할 일이지,
일상생활을 박살내는건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체계가 먼저냐, 생활이 먼저냐에서 관료들은 종종 '체계'가 먼저다고 말하니까요.
도로명 주소를 도입하더라도 기존의 동 체계는 그대로 가는게 맞지 않나 싶습니다.
여긴 대한민국이니까요!
수천년간 써 오던 동 체계를 하루아침에 날려먹는게 정책인지..
정부에서 주장하는 동주소 폐기 사유는 '지번주소는 일제시대 산물이다' 정도밖에 없는데...
그러면 지번주소를 잘 고쳐서 쓰면 됐을텐데 싶더라구요.
그런데 토지주소는 여전히 지번주소 쓰는거 보면,
일제시대 산물이라서 도로명 주소로 바꾼다는건 그냥 핑계였던것 같아요.
정책은 윗사람이 바라보기에 깔끔하고 정교한 것 보다
일상생활에 유익한 방향으로 진행되는게 맞지 않나 싶습니다.
도로명주소.. 윗사람들이 보기엔 얼마나 깔끔했을까요.
수년간 국민의견 수렴했다는 근거도 있고... 시범사업도 훌륭하게 진행했다는 근거도 있고...
그런데 그게 다 서류상으로만 한 수준이라는게 문제가 아닐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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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가 내수에 더 치중한 나라라면 미국같이 뻐팅겨도 문제없었겠죠.
하지만 우리나라는 수출로 먹고살고 있고, 최근 들어선 외국인들의 출입도 빈번해진 상태입니다.
사회 시스템 전반이 외국과 얽혀 있는 상황에선 도량형 통일은 선택이 아닌 생활양식이 되었다고 봅니다.
일본/우리나라/중국/동남아들 전부 경제 발전의 첫 단추가 무역으로 시작했습니다.
반면 미국, 영국은 스스로 외부로 뻗어나간 전통적인 내수 강국입니다.
중국은 완전히 내수가 정립되면 독자 도량형으로 갈 가능성이 높다고 봅니다만,
적어도 아직은 아시아 국가들 중에선 수백년 된 전통 도량형을 국가 표준으로 내세울 만한 깡을 가진 국가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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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LPHY
02.04 19:33
미터법 비판은 국내에만 한정시킨 내용은 아니고,
오히려 서양의 과학만능주의 산물에 가깝다는 생각입니다.
미터법을 도입하면서 각 국가별 전통 단위를 말살시키기 시작한건 서양이었으니까요.
우리나라도 미터법 도입 당시에는 휴리스틱 단위가 말살된다는걸 아마 몰랐을겁니다.
단지 국제규격 통일이라는 장점만 바라봤겠지요.
법으로 정하거나 일정한g단위로 판매하도록 규제했으면 합니다
특히 대패삼겹살집들이
과거엔 1인분에 150g으로 시작했던거 같은데
요즘엔 90g짜리 집들도 나오기 시작하네요
여담으로 도로명주소
저희집은 너무 길어서 불러주기가 불편합니다
달맞이길xxx번x길
다음에 건물번호가 나오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