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슬픈 자화상.
2010.05.19 21:47
다산의 글을 다시 읽어보고 있습니다.
그는 사회개혁가였고 조선의 현실을 타파하고자 노력한 선비였습니다. 사실 이인화의 영원한 제국이니 아산이니 하는 되먹지 못한 드라마 류의 소설이나 글이 진실처럼 호도되는 시대에서 눈을 바로 뜨고 보는 노력이 무의미할 수도 있지만.ㅡ
그가 정조에게 탄원한 상소문 중에서 조선의 과거제도를 통박한 글이 있습니다. 문과의 시험은 이미 썩어 빠질대로 썩어 훈구대신이나 고관대작의 자제나 뇌물을 정기적으로 상납한 인사가 아니면 과정(과거장)에 들어갈 수 조차 없는 현실이여서 논외로 하였고.ㅡ
무과의 시험이라도 서북(함경도와 평안도)의 굳세고 억센 장정과 양남(호남과 영남)의 날래고 재주많은 사람이 이미 지방에서 높은 점수를 획득하고 과정에 들어오나 한양의 비단옷입고 호강하여 자신의 힘으로는 무릎도 세우지 못하는 명문귀족의 연약한 후손이 급재할 길이 없으므로 돈을 주고 무리를 작당하여 어두운 길에서 또는 주막에서 시비를 걸어 갈비뼈를 부러뜨리거나 이런 간계를 벗어나면 7명의 시관에게 귀뜸하여 솜털같은 잘못이 있드라도 탈락시키므로 국가의 근간이 될 장정이 낙향하여 칼을 꺾고 살을 부러뜨리며 다시는 과정에 나아가지 않는다는 맹세를 한다고 했습니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의 혹독한 국치를 경험하고 세종과 더불어 조선왕조의 현군이었다는 정조의 치세에도 곧은 신하의 직언은 통치자에게 쓴소리였다는 것입니다.
정조는 다산의 천주교 이력을 아주 오랫동안 이용합니다. 그를 측신으로 등용하다가 한직으로 내몰기도 하고 체재공의 압력수단으로 사용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다산의 개혁사상을 수용하지는 않습니다. 뜻이 열려있는 군주가 아니었지요.
다산은 자신이 젊은 시기 새로운 학문에 대한 호기심으로 천주실기를 읽었다는 고백도 하고 어리석은 짓이었다고 용서를 바라지만 이미 정조의 눈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권력은 부패하기 마련이고 반성이 없는 위정자는 기득권의 안락함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일까요.
충무공이 15세기에 태여나서 무과에 합격한 것이 그나마 다행이라고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정약용에 대한 평가들을 읽고 있노라면 정말 엄청나게 앞서 간 사람이었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시대가 따라가지 못하니 결국 앞서 간 사람이 바보가 되어 버리는구나 하는 생각도 들고요. 작년에도 시대보다 한참을 앞서 간 사람을 떠나보내야 했지요.
어쩌면... 선도하는 사람의 발목을 붙잡는 존재 중 한 명일런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ㅠ_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