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국의 영웅, 흐루시쵸프 - 1/6
2010.09.26 23:11
1964년 가을 정권이 교체되고 니키타 흐루쉬쵸브는 지구상 가장 커다란 국가의 수장으로부터 물러나서 모두에게 잊혀진 연금생활자로 돌아간다. 크렘린에서 내려와 모스크바에서 70킬로미터 떨어진 오두막집에서 살게 된다. 특별요원들이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게 된다. 그는 여기서 자신의 일지를 녹음기를 통해 기록하기 시작한다.
흐루시쵸프는 이 기록들이 절대로 들려지지 않을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이 기록의 존재가 새로운 권력자에게 알려지자 흐루시쵸프는 즉시 크렘린으로 불려갔고 즉시 조용히 할 것을 요구받는다. 하지만 그를 따르기를 거부한다. 1970년 특수요원들은 흐루시쵸프의 아들을 수색하여 모든 테이프를 수거하고 이미 프린트된 일지들을 압수한다.
[생략: 대체 뭘 기록하고 있는가... 등등 KGB의 심문내용]
당시에는 아무도 몰랐던 사실은 흐루시쵸프가 이들을 복사본을 이미 외국에 넘겼다는 것이다. 몇몇 골라진 기록외에 이에 대해서는 아무도 들어보지 못했다. 이 기록은 역사에 기록될 기회를 잃어버렸다. 이 기록은 소비에트 역사에서 가장 논쟁이 되는 지도자, 니키타 세르게이비치 흐루시쵸프를 그리고 있다. (* 이하 흐루시쵸프의 음성 인용표시처리)
"나는 은퇴한 삶을 살고 있다. 나에게 미래나 현재는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지나간 길의 분석의 시기로 들어가기 때문이다. 그 지나간 길은 좋았다. 나는 그 앞에 부끄럽지 않고 자랑스럽다."
40년대 말까지 니키타 세르게이비치는 스탈린의 측근에 가장 가까운 사람들중 한명이었다. 그의 회상에 따르면 지도자는 그의 측근들을 두렵게 만드는 것을 매우 좋아했다고 한다.
[흐루시쵸프의 스탈린 회상]
"내가 죽고, 긴장해야 한다, 마치 빈 탄창처럼 제국주의세력들은 소진할 것이야.
소비에트 연합을 굳게 방어해야 한다!"
"우리는 침묵했지... 그런 논쟁에서 그에 대항하는 것은 덧없는 일이었지."
"마치 스탈린 자신도 소련이 공격당하는 가능성에 대해 두려워했다고 생각한 것 같아"
하지만 흐루시쵸프가 틀린 것이었다. 스탈린은 서방의 속성을 날카로이 간파하고 있었다. 2차대전에 이어 영국과 미국이 원자폭탄으로 근자에 동맹국이었던 소련을 공격하는 계획으로 계속하는 것을 누르지 못했다. 여기서 '냉전'이 시작되게 된다.
1949년 미국의 펜타곤은 거대한 규모의 "즉시공격"을 시작한다. 300의 원자폭탄들이 70개의 소련도시들을 핵먼지로 만들기 위해 조준하고 있었다. 모스크바, 레닌그라드, 노보시르스크, 키예프, 트빌리시등 수십개의 다른 도시들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비극적 운명을 맞게 될 처지였다.
스탈린은 이 전쟁에 최대한 대비한다. 소비에트군대는 전쟁후 급격히 줄어든 군대에 3백만의 군대를 충원한다. 하지만 1953년 위대하고 동시에 무서웠던 지도자는 죽는다. 니키타 흐루시쵸프는 20세기의 역사상 가장 복잡한 순간에 지도자에 오른다. "냉전"은 어느 순간에서건 악몽으로 변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이러한 와중에 흐루시쵸프가 자본주의자들과 심각하게 처음 대면하게 된 것은 1955년이었다. 여기에서 흐루시쵸프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회담내용 생략]
미국인들은 소련이 실은 자신들보다 최소 10배는 적은 수의 핵탄두를 보유하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알지 못했을 뿐더러 알면 안됐다.
니키타 세르게예비치는 영향권을 나누는데에 있어 핵 보유의 수의 문제가 필수적 문제라는 점을 이해하고 있었다. 다음 몇년동안 소련의 로켓개발자 세르게이 꼬롤레브는 근본적으로 새로운 종류의 대륙간 탄도미사일의 개발에 성공한다. 곧 흐루시쵸프는 이 로켓들이야말로 자본주의자들을 겁먹게 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게 된다.
1956년이 되자 흐루시쵸프는 근동지역에서 새로운 친구가 나타난다. - 이집트의 가말 압둘 나세르였다. 몇달간 이집트는 영국과 프랑스의 군사적 지원에 힘입은 이스라엘에 의해 공격당하고 있었다. 하세르는 소련의 장성들에 도움을 청해왔다. 흐루시쵸프는 어떻게 할 것인가?
뻬르브이까날 흐루시쵸프의 일지에서 1/6
나머지편은 다음에~
간만의 게시물인듯해요..
추석은 잘보내셨나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