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의 역습 5/6
2010.09.28 07:49
"미국인들이 응답을 할 차례였지. 그들은 국경으로 전진하는 의도를 내보이고 체면을 차리려면 칼을 휘둘러야 하는데, 국경에서 군사력을 보여주고는 이제 그저 군대를 거두는 것은 그것은 뭐랄까 그들의 사기에 상처받는 것이었지. 우리가 총구를 겨누고 있는데 그들이 물러나는 형상이된다면 말이야"
"우리가 군대를 후퇴시키자 20분이 되기전 미군도 군대를 빼기 시작했지"
세계는 한숨을 돌린다. 그당시 누구도 알지 못했다. 1년이 채 지나기 전에 우리들의 행성은 다시한번 핵전쟁의 포화에 놓이게 된다. 이것은 카리브해의 섬 쿠바에서였다.
1959년 미국과 카스트로가 이끄는 쿠바의 새정부간의 관계는 공개적으로 적대적이 된다. 이때까지 크레믈린은 쿠바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는데 -결국 적의 적은 잠재적인 친구라는 말도 있듯- 갑자기 논란의 중심이 되었고 "자유의 섬"을 제국주의자들의 침략으로부터 방어하자는 측으로 움직이게 된다.
1961년 4월 이미 미국측에서는 쿠바에 위협을 가하고 있었다. 미국의 코만도들은 쿠바출신의 이민자들로 구성하여 CIA하에서 훈련되어서 쿠바섬에 파견된 것이다. Zapata라 명명된 작전명을 갖은 군대의 목적은 아바나에 침투하여 전복하고 피델카스트로의 공산정권을 무너트리는 것이었다. 하지만 Zapata는 대실패로 돌아간다.
보고서가 흐루시쵸프에 올라간다. 새로운 거대규모의 미국군이 쿠바에 1962년 10월에 침공을 계획하고 있다는 정보였다. 그는 카스트로의 용감함에도 불구하고 그에게는 가망이 없을것이라 봤다.
"미국이 쿠바를 침공하면 쿠바는 존재하지 못할 것이야, 나는 국방장관에게 물어봤지. 미국의 군사력으로 봤을 때 쿠바군을 무너트리는데 얼마나 걸릴까?라고. 말리노브스키는 "채 이틀을 못버틸겁니다"라고 답했지."
62년 미국군은 쿠바에 상륙한다. 쿠바인들은 격렬히 저항한다.
흐루시쵸프는 소련의 친구 쿠바에게 그러한 처절한 죽음을 맞게 할 수는 없었다.
"이 섬은 꼭 구해져야 한다"라 니키타 세르게예비치는 결정한다.
흐루시쵸프는 서방을 겁먹게 하는 것에 능숙했다. 가끔씩 그는 실제로 그러한 무력이 가능한 것처럼 호언했다. 예를 들어 인간역사상 가장 커다란 폭탄 '짜르-폭탄'을 만들어 실험한 것이 그렇다. 그는 미국이 '가장 적은 피로써' 정복할 수 있다는 환상을 깨주는 것이 중요했다.
"우리는 컨베이너 벨트에 소시지를 만들듯 로켓들을 만든다" 라 그는 말했다. 하지만 사실 1962년 미국까지 날아갈 수 있는 미사일은 전부 27기 뿐이었다. 하지만 미국이 Nato를 통해 터키로부터 동원할 수 있는 핵탄두를 실어서 소련까지 날릴 수 있는 로켓의 수는 400을 넘고 있었다. 흐루시쵸프는 이것을 수치스러운 꼬리내리기처럼 인정하기를 거부했다. 그리고 그는 곧 그 방법을 찾는다 - 중동과 근동지방에 소련이 로켓들을 배치하는 것이었다. 소련에 필요한 대륙간탄도미사일을 쿠바에 제공하는 것이었다.
"우리가 비밀리에 로켓은 이미 전쟁에 필요한대로 배치될 것이었다. 이것이 미국측이 전쟁을 시작하는 것에 적절한 억지력을 갖추게 될 것이었지. 그를 어렵게 만든다면 그것만으로도 좋은 것이었지..."
1962년 7월 소련은 "아나디르"작전을 시작한다. 이것은 NATO에게 소비에트 해군이 대양의 조사활동을 하고 있다고 믿게 만들었다. 수송품은 소련의 6항구에서 동시에 출항하는 것이었다. 트랙터같은 다른 농경기계들을 싣고 있었다 - 이것을 의도적으로 촬영하게 하고 밤에는 군수물자를 적재했다. 핵탄두를 장착한 60개의 로켓과 헬리콥터, 탱크들을 실었다. 작전은 선장들마저 그들의 행선지를 숨길 정도로 극도의 기밀을 요하는 것이었다. 승선한 선원들에 선장이 행선지를 말한 것은 대서양을 벗어나서였다.
1962년 10월중순 쿠바의 상공에 미국의 정찰기 U-2가 보내진다. CIA는 여기서 얻은 촬영을 읽게되자 로켓발사대를 건설하고 있는 모습과 운송기, 로켓들이 잡힌 것이 드러난다. 이를 숨기는 것은 그리 성공적일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