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르트르의 대지의 저주받은 자들 서문 해석
2011.07.10 16:05
사르트르 (1905~80)
사르트르의 <대지의 저주받은 사람들>의 서문
서문의 의미 : 민주주의는 식민지배와 양립할 수 없다..
유럽인은 동양을 '괴물'과 '從'으로 만들면서 인간이 되었다 그리고
그밖의 내용
얼마 전에 지구의 인구는 20억 명을 넘어섰다. 그 중 5억 명은 인간이고, 15억 명은 원주민이다. 전자는 하느님의 말씀을 가졌으며, 후자는 그것을 가져다 썼다. 양자 사이에는 돈을 받고 일하는 왕, 영주, 부르주아지, 온갖 야바위꾼, 거간꾼들이 설치고 다녔다. 식민지에서는 진실이 적나라하게 드러나지만, 모국의 국민들은 진실이 은폐되기를 바랐다. 원주민들은 마치 아이가 어머니를 사랑하듯이 모국의 시민들을 사랑해야 하는 것이다. 유럽의 지배층은 원주민 지배층을 마음대로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그들은 유망한 젊은이들을 발탁하여 붉게 달궈진 낙철로 그들의 이마에 서구 문화의 낙인을 찍고, 그들의 입에는 끈적끈적한 점액질의 미사여구를 가득 채워 재갈을 물렸다. 그들은 모국에 잠시 체재하는 동안 하얗게 표백되어 자기 나라로 돌아갔다. 이 살아있는 거짓들은 자신들의 동포들에게 아무 말도 해주지 못하고 다만 남의 말을 되풀이할 따름이었다. 파리에서, 런던에서, 암스테르담에서 우리는 “파르테논! 형제애!”라고 외쳤다. 아프리카나 아시아에서도 입만 열면 “… …테논! … …애!”를 외쳤다. 가히 황금기였다.
이제 그런 시대는 끝났다. 입들이 스스로 열렸다. 노랗고 검은 목소리들은 여전히 우리의 인간주의를 말했으나 그것은 우리의 비인간성을 책망하기 위해서였다. 우리는 그 정중한 분노의 주장을 들으면서 불쾌해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처음에는 뿌듯함과 놀라움을 느꼈다. 뭐라고? 그들이 스스로 말할 줄 안다고? 드디어 우리의 작업이 성과를 거두었도다! 우리는 그들이 우리의 이념을 받아들이리라고 확신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오히려 우리가 그 이념에 충실하지 않았다고 비난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유럽은 자신의 임무를 수행할 수 있다. 그것은 바로 아시아를 그리스 문명권으로 만들고, 그리스-라틴 흑인이라는 새로운 종족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거기서 더 나아가 우리는 세계인의 자격으로 우리들끼리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그들이 마음껏 소리치게 놔둬라. 그러면 그들의 마음이 풀릴 것이다. 짖는 개는 물지 않는 법이니까.”
그런데 새로운 세대가 등장해서 사태를 변화시켰다. 새 세대의 작가와 시인들은 놀라운 인내심을 가지고, 우리의 가치관과 그들이 살아가는 참된 현실이 서로 들어맞지 않으며, 그들로서는 그 가치관을 완전히 외면할 수도, 그렇다고 그것에 동화될 수도 없다는 점을 우리에게 설명하려 했다.
그들이 하는 말은 대체로 이렇다. “당신들은 우리를 괴물로 만들고 있다. 당신들의 인간주의는 우리가 다른 사람들과 같다고 주장하지만 당신들의 인종주의적 조치들은 우리를 차별하고 있다.” 우리는 아주 편안하게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식민지 관리들은 헤겔을 읽고 봉급을 받는 게 아니므로 헤겔을 거의 읽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양심을 불편하게 하고 모순에 빠지도록 만드는 철학자 따위가 아쉬울 리 없다. 양심의 불편은 어쩔 수 없으니 그대로 놔두자. 아무리 말해봤자 입만 아플 따름이다. 학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그들이 탄식 속에서도 요구하는 게 있다면 그것은 차별의 폐지다. 물론 차별을 폐지하는 것은 충분히 가능하다. 알다시피 과도한 착취에 의존하는 체제는 결국 파멸하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은 코 앞에 당근만 매달아줘도 죽어라고 달릴 것이다. 그러니 반란 따위는 전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제 정신을 가진 원주민들 중에 고작해야 유럽인들처럼 되기 위해 유럽의 잘난 아들들을 학살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요컨대 우리는 그 우울한 사람들의 의욕을 고취하기 위해 한 번쯤 흑인에게 공쿠르 상(프랑스의 가장 권위 있는 문학상 – 옮긴이)을 주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1939년까지는 그랬다.
그럼 1961년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쓸모없는 탄원과 역겨운 흉내로 시간을 낭비하지 말자. 이 유럽을 떠나라. 인간에 관해 전혀 이야기하지 않으면서 자신들의 거리에서, 세계 각지에서 보이는 대로 인간을 살육하는 이 유럽을 버려라. 수백 년 동안 유럽은 이른바 정신적 체험이라는 명목으로 인간성을 무참하게 짓밟았다”. 이 말은 새롭다. 누가 감히 이렇게 말하는가? 그는 아프리카인, 제3세계인, ‘원주민’ 출신이다. 계속해서 그는 말한다. “유럽은 지금 무모한 광기에 휩싸여 끝없는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유럽으로부터 최대한 빨리 멀어져야 한다.” 쉽게 말해서 유럽은 글렀다는 이야기다. 입으로 말하기에는 썩 유쾌하지 않겠지만 우리 유럽인들 모두가 굳게 확신하고 있는 진실이 아닐까?
그러나 한 가지 유보할 게 있다. 예컨대 프랑스 사람들이 자기들끼리 “이 나라는 글렀어”라고 말한다면 – 내 기억으로 1930년 이후에는 거의 매일 그런 말을 들은 듯하다 – 그것은 감정적인 이야기에 불과하다. 즉 그들은 애증이 뒤섞인 격한 감정으로 그렇게 말할 뿐이다. 그래서 그 말 다음에는 흔히 “이러저러하게 하지 않는다면”이라는 말을 덧붙인다. 그 의도는 명백하다. 더 이상 잘못을 저질러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자기가 주장하는 방침이 철두철미하게 시행되지 않을 경우에만, 그럴 때에만 나라가 엉망이 되리라는 이야기다. 요컨대 그 위험의 뒤에는 조언이 따르며, 애국적 상호주관성에서 비롯된 것인 만큼 그 말은 그다지 충격적이지 않다.
그러나 그 반대로, 파농이 말하는 유럽의 현재 위기는 단순한 경고나 진단의 의미가 결코 아니다. 이 의사는 유럽이라는 환자가 기적을 바랄 만큼 절망적인 상태에 있다고 애써 주장하지도 않으며, 그렇다고 치료약을 주지도 않는다. 그는 다만 자신이 관찰할 수 있는 징후를 통해 유럽이 죽어가고 있다는 외적 증거를 밝힐 따름이다. 사실 치료제 따위는 그의 안중에 없다. 그는 다른 것을 염두에 두고 있으므로 유럽이 사느냐 죽느냐에는 관심이 없다. 그의 책이 논란을 일으키는 것은 그 때문이다. 만약 여러분이 다소 낭패한 기색으로, “그가 우리를 대신해서 말하는군!”이라고 중얼거린다면, 여러분은 그 논란의 참된 본질을 파악하지 못한 것이다. 파농은 어느 누구도 대신하지 않기 때문이다. 일부 독자들의 열광적인 반응을 얻은 그의 책에 대해 여러분은 싸늘한 반응을 보일 수도 있다. 그는 여러분에 관해서 말할 뿐 여러분에게 말하지는 않는다. 흑인종도 공쿠르 상을 받았고 황인종도 노벨 상을 받았다.
식민지 시대의 월계관은 이제 끝났다. 프랑스어를 배운 원주민 출신의 청년은 바로 그 프랑스어로 자신의 동포들을 향해 “모든 저개발국의 원주민들이여, 단결하라!”고 외치고 있다. 얼마나 황당한가! 과거에는 우리만 말할 줄 알았지만 지금 그들은 우리를 제대로 된 중재자로조차 여기지 않는다. 우리는 그들의 이야기에서 한낱 대상에 불과하다. 파농은 세티프(알제리 해방 운동의 한 거점이었던 도시 – 옮긴이), 하노이, 마다가스카르에서 우리가 저지른 범죄들을 언급하지만, 비난하는 데 시간을 허비하기보다는 그것을 활용하고자 한다. 그가 식민주의의 전술, 식민주의자들과 모국 민중을 단결시키거나 분열시키는 복잡한 관계를 설명하는 이유는 자신의 동포를 위해서다. 즉 그의 의도는 동포들을 가르쳐 우리가 만든 게임판에서 우리를 이기도록 하는 데 있는 것이다.
요컨대 이제 제3세게는 자기 자신을 찾고 자신의 목소리로 자기 자신을 이야기한다. 물론 제3세계라고 해서 동질적인 집단은 아니다. 제3세계에는 여전히 예속된 민족들이 많고, 허울뿐인 독립을 얻은 민족이 있는가 하면, 주권을 쟁취하기 위해 지금도 싸우는 민족, 완전한 자유를 얻었으나 제국주의 열강의 위협에 항상 노출되어 있는 민족도 있다. 이러한 차이는 식민지의 역사, 다시 말해 억압에서 비롯된다.
모국은 봉건적 지배자로 군림하면서 충분한 대가를 얻어내는 한편, 분할 통치를 통해 원주민 부르주아지, 즉 머리에서 발끝까지 위선적인 자들을 만들어냈다. 또한 모국은 식민지에 이주민(colon)을 보내면서 동시에 식민지를 착취하는 사기극을 벌이기도 했다. 이런 식으로 유럽은 분파와 반대파를 양산했고, 여러 계층과 때로는 인종적 편견까지도 만들어 냈으며, 온갖 수단을 동원해 식민지 사회의 계층 분화를 심화시켰다.
파농은 아무것도 숨기지 않는다. 그 예전의 식민지였던 곳은 우리와 싸우기에 앞서 먼저 자기 자신과 싸워야 한다. 어쩌면 그 두 가지 투쟁은 사실상 같다고 볼 수도 있다. 투쟁의 열기 속에서 내부의 모든 장벽들은 무너진다. 기업가와 상인으로 구성된 괴뢰 부르주아지, 늘 특권적 지위를 누리는 도시 프롤레타리아, 소도시의 룸펜 프롤레타리아는 모두 민족 혁명군의 든든한 예비대인 농민 대중과 행동을 함께 하게 된다.
식민주의로 인해 발전이 가로막힌 나라에서는 농민층이 들고 일어나면 순식간에 혁명적 계급으로 부상할 수 있다. 농민들은 노골적인 억압을 겪고, 도시의 노동자들보다 더 큰 고통에 시달리며, 굶주림으로 죽지 않기 위해 기존 체제를 전면적으로 타도하려 하기 때문이다.
민족 혁명이 승리하려면 사회주의 혁명이어야 한다. 그 과정이 생략되어 토착 부르주아지가 권력을 장악하면, 신생국은 명목상으로는 주권을 얻었을지 몰라도 여전히 제국주의자들의 수중에 있는 것이다.
카탕가(콩고 독립 후 심한 내분을 겪었던 콩고 남서부 샤바 지역의 옛이름 – 옮긴이)의 사례가 그 점을 잘 보여준다.
제3세계의 단결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 단결을 이루려면, 먼저 각 나라가 독립을 얻은 뒤에도 예전처럼 농민층의 지도 아래 식민지 민중 전체가 단결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파농이 아프리카, 아시아, 라틴아메리카의 형제들에게 설명하는 내용이다. 모든 지역에서 한꺼번에 혁명적 사회주의를 쟁취하지 못하고 한 나라씩 혁명이 전개된다면 에전의 식민지 주인들에게 패배하고 말 것이다. 그는 아무것도 숨기지 않는다. 약점과 불화도 솔직히 드러내며, 신비화하지도 않는다.
어떤 곳에서는 운동의 출발부터 나쁘기도 하고, 어떤 곳에서는 초기에 상당한 성공을 거둔 뒤 기회를 놓치기도 한다. 운동이 교착 상태에 빠진 곳에서 다시 추진력을 얻으려면 농민들이 자국의 부르주아지를 타도해야 한다. 독자들이 경계해야 할 대단히 위험한 도깨비불은 지도자나 인물, 서구 문화에 대한 숭배다. 또한 사라져가는 과거 아프리카 문화로 퇴행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로 위험하다.
유일하게 참된 문화는 혁명의 문화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완성된 게 아니라 끊임없이 형성되고 있는 중이다. 파농은 큰 소리로 외친다. 지금 이 책을 손에 들고 있는 우리 유럽인들은 분명하게 그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그렇다면 그는 식민지 강국이 그의 순수한 마음을 악용할 것을 걱정하지 않을까?
아니다. 그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시대에 뒤떨어진 우리의 방법으로는 해방을 늦출 수는 있어도 멈출 수는 없다. 그렇다고 우리가 우리의 방식을 변화시킬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신식민주의라는 모국의 나태한 꿈은 다분히 허풍이다. 우리는 ‘제3세력’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설사 존재한다 해도 싸구려 부르주아지에 불과할 뿐이고 식민주의는 이미 제 자리를 잡았다고 믿고자 한다. 그러나 우리의 마키아벨리즘은 우리의 허구성을 낱낱히 밝혀내는 깨어난 세계에 대해서 거의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식민지 이주민은 오직 한 가지, 야만적 폭력에 의지할 수밖에 없으며 – 그럴 능력이 있을 경우 – 원주민은 예속과 주권 중에서 하나를 택할 수밖에 없다. 파농에게 여러분이 그의 책을 읽느냐, 안 읽느냐가 무슨 상관이겠는가? 그는 자신의 동포들에게 우리의 낡은 술수를 고발하고 있으며, 우리에게 더 이상의 방책이 없다고 확신한다. 그들에게 그는 이렇게 말한다. “유럽이 우리 대륙에 손을 댔으니 우리는 그 손을 후려쳐서 떠나가게 만들어야 한다.
지금은 아주 좋은 때다. 비제르타(현재 튀니지의 반자르트 – 옮긴이), 엘리자베스빌(현재 콩고의 루붐바시 – 옮긴이), 알제리의 벽촌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전세계에 알려지기 때문이다. 게다가 두 진영은 서로 적대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 마비 상태를 이용하자. 역사의 현장으로 뛰어들어 역사상 최초로 우리가 보편성 속에 침투해 들어갈 수 있는 기회다. 투쟁을 시작하자. 마땅한 무기가 없다면 칼이라도 충분하다.”
유럽인들이여, 당신들은 이 책을 열고 그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어둠 속에서 몇 발자국 나아가면 불 가에 모여 앉은 이방인들이 보일 것이다. 가까이 다가가서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라. 그들은 당신들의 무역 중심지와 그곳을 방비하기 위해 고용된 군인들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 아마 그들은 당신을 보겠지만 무시해버리고, 목소리마저 낮추지 않고서 자기들끼리 이야기를 계속할 것이다. 그들의 무관심이 폐부를 찌른다. 그들의 아버지들은, 어두운 생명들이며, 당신의 피조물인 그들은 죽은 영혼에 지나지 않았다. 그들에게 불을 준 것은 분명히 당신이지만, 당신은 그 유령들을 상대하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는 그들의 아들들이 당신을 무시한다. 불은 그들을 따뜻하게 하고 주변을 밝혀주고 있다. 그것은 당신이 밝힌 그 불이 아니다.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보니, 은밀한 야행성을 가진 데다 추위에 떠는 것은 바로 당신
나의 해석 :
유럽인들은 식민지인들은
나름의 문화와 능력을 갖고 있지 않으며...
평등하게 대접받을 자격이 없는
못나고 뒤떨어진 자들의 목숨을 빼앗는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즉 우리 유럽인의 기준에 우리처럼
뛰어난 판단과 행동이 부족해 보이는 존재들은
지배받아야할 괴물로 낙인찍는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던것이다...
유럽인들은 국가의 영광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식민지확장과
학살에 대한 끝없는 찬양으로
자신들을
군국주의와
식민지에서 얻은 이득으로 향락을 누리는
물질주의라는 틀에 가두는 괴물이 되어갔다...
그들은 열등한 존재를 정복할 수 있는것은
문명의 우수함을 드러내는 또 다른 길이라고 생각했다...
아프리카에 대해서는 문명이 없는 전염병과 암흑의 대륙
아시아에 대해서는 낡은 생각에 빠져나오지 못하는
새장속의 사람들...
그리고 서구 문화에 대한 숭배를 부추겨
수세대 동안 이어져온 원주민의 생각에 침입하여..
그들의 풍습을 화석으로 만들어버렸다...
(거의 사라져 찾아보기 힘들어졌다는뜻...)
그들은 말했다..
우리는 평등한 민주국가입니다...
식민지 주민 여러분들도 노력하면
공쿠르상같은 큰 상 많이 타서
우리와 평등한 지위에 올라설 수 있습니다...
그것은 또다른 거짓과 비웃음이었다...
그들이 말하는 평등은
원주민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잔인한 조롱에 불과했다...
그들은 지배받는 원주민 밑에
식민지 관리와 함께
이주민들과 토착민 대지주들을
원주민을 감시하고 탄압하는
또다른 지배계층으로 탄생시켰다...
정복된 식민지에서
유럽이 자국의 헌법에서 부정한다는
계급제 국가를 만들어내는 또다른 위선을 저지른것이다...
전쟁과 야만적 정복에 대한
자화자찬에 묻혀버린
인간성의 회복은
모든 식민지의 해방과
미국중심의 제 1세계와
소련 중심의 제 2세계의
제 3세계에 대한 평등한 관계가 이루어질때
비로소 완성될 것이다...
진정한 민주주의는
그 나라에서 권리를 가진 사람들
(예를 들면 백인 남녀..)
만이 아니라...
그 나라 또는 인종들이
다른 상황에 놓인
그 나라와 인종에 대해
우월의식이나 행동을
버리는것도 포함하기 때문이다...
“볼테르를 체포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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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희 |
폭탄테러로 부서진 사르트르의 아파트 |
드골의 배려 덕분에 그는 기소는 면했지만 그의 아파트에 폭탄세례가 이어졌다. 그러나 그 전에 다른 곳으로 이사해 화를 면했다. 폭탄세례가 있었지만, 그는 현실에 대한 발언과 참여를 멈추지 않았다.
그는 파농의 <대지의 저주받은 자들>의 서문에서 유럽의 제국주의를 고발하고, 제3세계를 강력하게 옹호했다. 1965년에는 미국의 베트남 침공에 대해 미국을 방문하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거리에서 시위를 벌인 적이 있다.
1966년에는 러셀과 함께 베트남에 대한 미국의 범죄를 고발하기 위해 국제재판정에 참가하기도 했다. 파리에서 발생한 68년 5월 혁명에서 학생들을 지지하고 시위를 주도했다. 그러나 드골의 발언으로 그는 체포되지 않았다.
사르트르는 드골의 정치적 입장을 줄곧 적대해 왔다. 통렬한 비판의 글을 쓰기도 했고, 발언도 했다. 드골은 그런 사르트르를 프랑스의 지성의 상징이자 양심인 ‘볼테르’로 선언한 것이다. 프랑스정부의 이미지를 고려한 조치였다.
이 선언으로 사르트르는 치외법권적인 존재가 되었다. <누벨 옵세르바퇴르>의 기자 장 모로는 시위대 전면에 섰던 시몬 드 보부아르, 장 폴 사르트르와 함께 경찰에 연행된 적이 있었다.
그는 보부아르와 사르트르의 신분을 확인한 경찰이 어떤 제재도 없이 이들과 함께 연행된 시위대를 풀어주는 것을 목격했다. 이러한 목격을 한 장 모로는 낙태합법화 운동을 위해 사르트르와 보부아르를 바람막이로 해서 ‘낙태 선언 343인’ 선언이라는 더 큰 시위를 준비하기도 했다.
드골이 ‘치외법권’적 존재로 인정한 이 사르트르는 누구인가? 사르트르는 1905년 6월 21일 파리에서 출생하였다. 아버지는 프랑스 해군 장교였다. 그러나 그가 15개월 되었을 때 베트남 파견 때 걸린 열병으로 아버지가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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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희 |
어린시절의 사르트르 |
두 사람 사이에는 별로 접촉이 없었다. 그러다 1962년 사르트르의 아파트가 테러를 당하자 슈바이처가 그에게 편지를 보내 위로해 주었다. 그리고 사르트르가 반핵 운동을 벌일 때 슈바이처는 전폭적인 동감을 표시했다.
슈바이처의 작은 아버지, 다시 말해 사르트르의 외조부는 고등학교 독일어 교사였다. 외조부는 어린 사르트르에게 수학과 고전문학에 대해 가르쳐 주었다. 사르트르는 외조부의 서재에 가득 찬 책들을 통해 세계를 발견한다.
키가 작고 사팔뜨기였던 그는 같이 놀 친구 보다 할아버지의 서재에서 책을 읽고 글쓰기는 것을 더 좋아했다. 사르트르는 만년에 쓴 자전적 소설 <말>에서 어린 시절에 대해 이렇게 회상한다.
“내가 세계를 만난 것은 책 속에서였다… 나는 나의 종교를 발견한 셈이다. 책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고 생각했으니까.”
책에서 종교를 발견하다
사르트르는 파리에 있는 앙리 4세 리세에 들어갔다. 얼마 뒤 어머니가 재혼하고 나서는 라 로셀로 옮겼다. 외조부의 서재에서 보냈던 나르시즘적인 자기 행복은 어머니가 재혼하면서 깨지고 말았다.
사르트르는 라 로셀에서 보낸 시기를 ‘내 평생 최악의 시기’였다고 말을 했다. 이 시기에 사르트는 소위 사춘기를 겪은 것 같다. 어머니의 재혼으로 배신감을 느꼈고, 의부와 겉으로는 사이가 좋았지만 속으로 거리를 두었다. 자기가 사팔뜨기에 못생겼다는 것을 느닷없이 깨닫고 불안해하기도 했다. 그리고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단정하고, 이러한 생각을 죽을 때가지 바꾸지 않았다.
사르트르가 문학이 아니라 철학을 전공하기로 결심을 굳힌 것은 1922년쯤에 베르그송의 <의식의 직접적 소여에 관한 시론>를 읽은 다음부터였다. 그는 계시를 받는 듯한 충격적인 경험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철학이란 진실을 가르쳐 주니 정말로 대단한 것이로구나 하고 나는 생각했다… 한 권의 책이 되어 하늘로부터 떨어진 진실 앞에서 나는 생각했다. 또 다른 진실들이 떨어지게 해야 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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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희 |
사르트르와 보봐르 |
그는 고등사범학교 시절을 “입학 첫날부터 독립의 시작”이고 “4년간의 가장 행복한 시기”였다고 회상한다. 그러한 대가일까. 1928년 그는 교수자격시험에서 낙방을 하고 만다. 너무 독창적인 생각 때문에 낙방되었다고 그는 생각했다.
낙방의 결과로 친구 사촌누이 동생과의 약혼이 취소되었다. 미래의 장인이 될 뻔한 사람이 고등사범학교 졸업생이지만 낙방한 사람에게 딸을 줄 수 없다는 이유였다.
사르트르는 다음 해에 다시 교수자격 시험을 준비하면서 보부아르를 만났다. 둘 사이는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두 사람은 상호 간의 자유와 사랑을 동시에 실현시킬 수 있는 2년간의 계약 결혼에 들어간다.
이 계약 결혼은 파격적인 것이었다. 2년간의 계약결혼 후에 두 사람은 평생 반려가 된다. 교수자격 시험에서 사르트르는 수석을, 보부아르는 차석을 차지했다. 그는 1929년 11월부터 생시르 육군사관학교에서 기상관측병으로 18개월 동안 군 복무를 했다.
병역을 마친 후 르아브르 소재 고등학교에 철학교수로 발령을 받았다. 이때 그는 보부아르와의 정식 결혼을 고려했으나, 결혼 제도가 자유를 제한하는 부르주아의 제도로 보여 포기하고 말았다.
1933년 9월에 그는 베를린에 있는 프랑스 연구소에서 1년 동안의 연구 생활을 시작한다. 그는 후설을 연구하였다. 베를린에서 돌아 와 <자아의 극복>(1934), <상상력>(1936)을 출간했다. 이 책은 당시 사르트르가 현상학에 대한 심취해 낳은 저술이었다.
1937년에 그는 파리에 있는 학교로 옮기게 된다. 보부아르는 1년 전에 이미 파리에 와 있었다. 그들은 몽파르나스 거리의 같은 호텔에 기숙했다. 그러나 그들은 같은 층에 있는 방을 사용하지 않음으로써 자유와 사랑을 동시에 실현시킨다는 당초의 목표를 지켜 나갔다.
그 와중에도 창작에 왕성한 의욕을 보여...
파리로 돌아와 다시 교직 생활을 하면서 <U>문학</U> 작품을 쓰기 시작하여 <U>1936년</U> 단편 <벽>을 완성했고 소설 《구토》를 출판<U>1938년</U> 함으로써 문학계에 널리 알려진다.
<U>제2차 세계 대전</U>시 <U>1940년</U> 독일군에 포로가 되어 지금까지 해명되지 않은 연유로 탈출하여 파리로 귀향하여 멜퐁티 등과 같이 대독 저항 운동 단체를 조직하였다.
<U>1943년</U>에 《존재와 무》를 내놓아 철학자로서의 지위를 굳히게 된다. 그리 활발하지 않는 레지스탕스 활동을 하면서 당시 레지스탕스에 적극적인 <U>알베르 카뮈</U>를 알게 된다.
그리고 종전 후인 <U>1945년</U> 10월 제3의 길을 알리기 위한 <U>잡지</U> <<U>현대</U>>지를 창간하여 실존주의에 대해서 논하면서 소설, 평론, 희곡 등 다채로운 문필 활동에 종사하였다.
또 1945년 미국의 초청을 받아 각지에서 강연을 하였다.
<U>1948년</U> 3월에는 제3의 정치 세력을 위해 <U>민주 혁명 연합 준비 위원회</U>를 결성했으나 친미화, 우익화로 내부 분열이 생겨 <U>1949년</U> 11월 끝장나고 말았다.
<U>1950년대</U> <U>프랑스 공산당</U>의 노동력과 용기에 감동해 <현대>지에 <U>프랑스 공산당</U>에 동조하는 글을 썼으나 이로 인해 많은 동료들이 떠났다.
그러나 1956년 소련의 헝가리 침공을 1968년 체코 침공을 비판하여
공산당과 결별하게 된다...
<U>1960년대</U>에는 <U>베트남전쟁</U>에 반대하는 평화운동을 실천하였다.
<U>1964년</U> <말>을 출판해 <U>노벨 문학상</U> 수상자로 올랐으나 수상을 거부했다.
이후 문학 저술을 계속해 <U>1971년</U> <U>플로베르</U> 평전 <집안의 바보> 1,2권을 출판하였으나
점점 힘을 잃어가기 시작하여...
<U>1973년</U> 갑작스러운 실명으로 문학 저술을 중단했다.
1975년에는 김지하 시인의 석방을 위한
양심선언문에 서명하기도 했다...
파격 그 자체지요.
김지하 시인과도 연관이 되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