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게시판


저는 그저 주입식 교육만 잔뜩 받은 공대생이었기에,

미터법이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미터법이 아닌 것은 잘못되었다는 생각을 해 왔습니다.

그래서 노무현 전 대통령의 미터법 제도를 매우 지지해 왔습니다.


하지만 요즘, 미터법에 대한 생각이 바뀌고 있습니다.

미터법은 현실세계에서의 경험을 떼어내는데 일조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가령, 고기 한 근의 무게를 생각해 봅시다.

한 근은 한 사람이 배부르게 먹을 수 있는 양으로, 고기 한 근은 600그램이고 과일이나 채소 한 근은 375그램입니다.


서로 무게가 다릅니다. 복잡하긴 한데...

한 근의 의미는 '한 사람이 배부르게 먹을 수 있는 양'입니다.


배부르게 먹는데 미터법이 필요한가요? 아닐겁니다...

고기 600그램을 먹든 375그램을 먹든 배부르면 그걸로 족합니다.


이걸 굳이 미터법으로 바꿔서 600그램으로 고정시켜두면, 거기서 근의 의미는 사라집니다.

그저 600그램이라는 미터법 단위로 바뀌게 됩니다.


배부르게 먹으려면 얼마나 먹어야 하는지 모르게 되어요.



먹는건 그렇다 치고...


'길'이라는 단위가 있습니다. 이건 사람의 키 만큼의 길이를 의미하는데, 보통 물 깊이를 측정하는데 썼었죠.

물 깊이가 한길 넘는 곳에 들어가면 빠져 죽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한길은 183cm인데, 이런게 중요한가요? 아닐겁니다.


"열길 물 속은 알아도, 한길 사람 속은 모른다." 느낌이 오지요?


그런데 이걸 미터법으로 바꾸면

"1.83km 물 속은 알아도, 183cm 사람 속은 모른다."

... 뭐 어쩌라고..... 이런 소리밖에 안 나옵니다.


183cm에서 사람 키를 떠올리기가 너무나도 어렵고

1.83km에서 사람 키의 열배를 떠올리기가 너무너무 어렵기 때문입니다.


우리 조상들은 183cm정도의 길이를 사람 키라고 생각해서, 쉽게 생각할 수 있도록 단위를 발전시켜 왔었구요.




한 가지 예를 더 들면, 척 또는 자 라는 단위가 있습니다.

흔히 한뼘이라고 하는 단위인데, 법정으로는 30.3cm입니다.


A4용지의 긴 면의 길이는 29.7cm인데요, 이게 29.7cm이라고 하면 안 와닿습니다.

그런데 이걸 한척 또는 한자 (한뼘)보다 아주 약간 작다고 말하면 금방 알아요.

굳이 자가 없어도 대략적인 크기를 알 수 있다는 겁니다.


물론 수학을 계산할 때는 정확한 수치가 필요할 수 있는데,

일상생활에서는 그런게 필요 없잖아요.

한근이 600그램인걸 알아야 하나요? 판매하는 사람이 법정 그램수를 정확히 알고 지켜서 팔면 되는 일입니다.




서양에서도 비슷한 논의가 있었는데요

가령 1파운드는 손에 쥘 수 있을 정도의 무게

1스톤은 돌 하나의 크기

1펄롱은 숨이 찰 때 까지 달릴 수 있는 거리입니다.


모두 상당히 비과학적인 단위라 생각할 수 있는데,

일견 직관적입니다.

우리 조상들의 지혜가 깃들어 있는 단위고요.


각각의 단위에 대한 미터법상의 정의가 있습니다.

그런데 미터법으로 보면 도무지 이 수치가 의미하는게 무엇인지 알 수 없습니다.

미터법은 그저 이론의 세계에서 살고 있는 단위일 뿐이니까요.




미터법이 일상생활 깊숙히 들어온 현상은 과학 만능주의의 산물이 아닌가 싶습니다.

미터법 중 그램의 정의를 보면... 1그램은 4℃의 물 1cm³의 질량이라고 나옵니다.

..... 그래서 뭘 어쩌라고... 하나도 도움이 안 됩니다.


미터의 정의는 더 심한데, 진공에서 빛이 1/299,792,458초 동안 이동한 거리입니다.


초는 더 이상한 정의를 가지고 있는데,

절대 영도에서 세슘-133 원자의 바닥 상태 (6S1/2) 에 있는 두 개의 초미세 에너지준위 (F=4, F=3)의 주파수 차이의 역수

라고 합니다.

어쩌라는건지.... 이게 느껴지시나요? 저는 그냥 후쿠시마 생각밖에 안 납니다. 세슘 특산지니까요.....


이론때문에 실생활에서의 휴리스틱이 완전히 박살나고 있습니다.


혹자는 미터법을 기반으로 휴리스틱을 만들어라(=미터법을 익숙하게 느끼도록 행동하라)고는 하는데,

저는 아직까지도 미터법이 안 와닿습니다.

반면에 그냥 '열길 물 속은 알아도 한길 사람 속은 모른다'쪽이 훨씬 와닿습니다.


애당초 미터법은 현실세계와 별 관계가 없는 단위니까요.

정말 부자연스러운 단위.





이론과 경험.


경험에서부터 이론이 나옵니다.

이론은 경험을 추상화시킨 개념에 불과한데요,

과학만능주의가 세상을 지배하게 되면서 이론이 경험을 지배하려는 현상이 나타나지 않나 싶습니다.





꼬리.

그래서 우리나라의 도로명주소도 잘못된 체계라 생각합니다.

도로명주소는 서양에선 오래전부터 널리 사용하고 있는 체계인데, 그들 조상의 사고방식에 적합한 구조입니다.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동'의 개념이 사용되어 왔구요. 물론, 처음부터 지금의 '동' 개념이 있었던건 아니지만

오랜 역사를 거치며 동의 개념이 꾸준히 개정되어왔습니다. 우리의 문화에 알맞도록.


그걸 한방에 날려버린게 도로명주소. 저는 아직도 도로명주소로 바꾼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목동이 아닌 동네가 왜 '목동중앙대로'인지. 바뀐지 10년이 다 되어가는데 아직도 전혀 적응이 안 됩니다.

도로명주소에 동이 포함되면 그게 도로명 주소입니까.. 도로명 주소의 탈을 쓴 동주소입니까...



우리가 사는 세상은 미터법으로 구성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을 해석하는 방법 중 하나로 미터법을 사용할 수 있을 뿐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사는 대한민국은 도로명주소로 구성되지 않았습니다.

강남이면 강남, 연남동이면 연남동, 이처럼 동네로 구성되어 왔습니다.

도로명주소는 '그들', 즉 서양인들의 역사 속에서 구성되어온 체계였습니다.

그걸 억지로 대한민국의 문화에 끼워 맞추니.. 시행 10년이 된 지금도 전혀.... 와닿지 않을겁니다.

우리나라는 애당초 도시의 구성이 동네를 기준으로 되어 왔으니까요.

지번주소가 싫었다면 지번주소를 개정하면 됐을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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