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연수의 원더보이
2012.09.11 22:35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살다보면 책이 먼저 나를 초대하는 경우가 있다. '원더보이' 역시 그러한 경우다.
지나쳐가듯 읽었던 글 속에서 소설 제목을 읽고 한참 후 회사 도서관 서가에 꽂혀있던 것을 보고 손을 뻗어 꺼내든 것은, 소설은 안 읽겠다는 평소의 생각조차 저멀리 던져버리게 한 것은 책이 나를 부르고 있었던 까닭이었다. 그렇게 하나의 이야기가 은연중 나에게 다가왔다.
이 소설은 형식상의 성장소설이지만 그 안에 작가의 시대인식과 역사의식이 담긴 소설이다. 그 역사의식의 층이 아주 얇긴 해도, 인위적인 짜맞춤이 보이기는 해도 그런 투박함 속에 이 소설은 또한 다른 사람의 머리를 빌어 전혀 생각해보지 않았던 것들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유용하다. 마치 정연희의 '난지도'를 읽는 것처럼.
이 책을 읽고 역시나 우주선 지구호에 탑승한 한 사람 한 사람이 소중하고 중요한 존재들임을, 그리고 그 가치를 지켜나가야 함을 다시금 확인했다(인간의 유전자가 하나같이 다른 형질을 발현함으로서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은 고유의 독자성으로 말미암은 유일무이한 존재로서의 존엄성을 획득하는 것이기에). 마치 100000000000개의 은하 속의 100000000000개의 별이 모두 다른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하나하나가 소중한 그 행성에서 누군가는 다른 누구를 짓밟고 뭉게버린다. 그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을 빼앗고 말살시켜버리는 것이다. 이것은 마르틴 부버가 말한 '나와 너'의 관계가 아닌 '나와 그것'의 관계로 상대를 전락시키는 것이다. 국가라는 이름으로 이러한 일상적 폭력이 그리멀지 않은 '과거(?)'에 이 땅에서 버젓이 자행되었던 것이다.
또 하나 언급할 점은 이 책이 임철우의 '붉은 방'처럼 이제는 기억 속에서 흐릿해진 80년대를 기억나게 한다는 점이다(이책을 읽고나서 잠이 들었는데 꿈에서 이한열을 보있다). 다만 전자와 다른 점은 보다 유쾌한 활극으로 80년대를 풀어가고 있다는 점이다(마르케스의 '백년동안의 고독'처럼). 게다가 독심술, 텔레파시, 기억술 등의 양념들이 그저그런 이야기로 흘러갈 수 있는 이야기에 재미를 부여하고 있기도 하다.
중구난방으로 글이 흘렀지만,
상처입은 사람들은 그때나 지금이나 서로를 위로하며 세상과 맞서 힘겨운 싸움을 해야할 터이다.
이천십이년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이제 그 아픔의 시기를 '추억'하기보다 '기억'해야 할 선택의 시기가 다가오고 있음을 바라본다. 그러고 보면 이 책이 왜 나를 불렀는지 이제는 조금 알 것 같다.
"용서하라, 그러나 잊지는 마라."는 문구가 문득 떠오른다.
지나쳐가듯 읽었던 글 속에서 소설 제목을 읽고 한참 후 회사 도서관 서가에 꽂혀있던 것을 보고 손을 뻗어 꺼내든 것은, 소설은 안 읽겠다는 평소의 생각조차 저멀리 던져버리게 한 것은 책이 나를 부르고 있었던 까닭이었다. 그렇게 하나의 이야기가 은연중 나에게 다가왔다.
이 소설은 형식상의 성장소설이지만 그 안에 작가의 시대인식과 역사의식이 담긴 소설이다. 그 역사의식의 층이 아주 얇긴 해도, 인위적인 짜맞춤이 보이기는 해도 그런 투박함 속에 이 소설은 또한 다른 사람의 머리를 빌어 전혀 생각해보지 않았던 것들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유용하다. 마치 정연희의 '난지도'를 읽는 것처럼.
이 책을 읽고 역시나 우주선 지구호에 탑승한 한 사람 한 사람이 소중하고 중요한 존재들임을, 그리고 그 가치를 지켜나가야 함을 다시금 확인했다(인간의 유전자가 하나같이 다른 형질을 발현함으로서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은 고유의 독자성으로 말미암은 유일무이한 존재로서의 존엄성을 획득하는 것이기에). 마치 100000000000개의 은하 속의 100000000000개의 별이 모두 다른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하나하나가 소중한 그 행성에서 누군가는 다른 누구를 짓밟고 뭉게버린다. 그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을 빼앗고 말살시켜버리는 것이다. 이것은 마르틴 부버가 말한 '나와 너'의 관계가 아닌 '나와 그것'의 관계로 상대를 전락시키는 것이다. 국가라는 이름으로 이러한 일상적 폭력이 그리멀지 않은 '과거(?)'에 이 땅에서 버젓이 자행되었던 것이다.
또 하나 언급할 점은 이 책이 임철우의 '붉은 방'처럼 이제는 기억 속에서 흐릿해진 80년대를 기억나게 한다는 점이다(이책을 읽고나서 잠이 들었는데 꿈에서 이한열을 보있다). 다만 전자와 다른 점은 보다 유쾌한 활극으로 80년대를 풀어가고 있다는 점이다(마르케스의 '백년동안의 고독'처럼). 게다가 독심술, 텔레파시, 기억술 등의 양념들이 그저그런 이야기로 흘러갈 수 있는 이야기에 재미를 부여하고 있기도 하다.
중구난방으로 글이 흘렀지만,
상처입은 사람들은 그때나 지금이나 서로를 위로하며 세상과 맞서 힘겨운 싸움을 해야할 터이다.
이천십이년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이제 그 아픔의 시기를 '추억'하기보다 '기억'해야 할 선택의 시기가 다가오고 있음을 바라본다. 그러고 보면 이 책이 왜 나를 불렀는지 이제는 조금 알 것 같다.
"용서하라, 그러나 잊지는 마라."는 문구가 문득 떠오른다.
문득 영진님의 글 같다는 생각을 합니다. 만문에 올라온 질문 글 덕택에 빗소리 들으면서 점심을 먹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