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게시판


물트는 골, 돌아가도 나아가리.

2010.03.19 20:35

명상로 조회:911 추천:12

                        

짧은 순간 깜박 정신줄을 놓을 때가 많습니다.  목이 말라 냉장고에 물을 마시러 가다가 주방을 지나며 여길 뭣하러 왔지?  하고 다시 돌아가기도 하고 자전거 배낭에 넣어 두었던 시계를 찾지 못해서 일주일이 넘게 기억을 더듬기만 하다가 배낭 끈 주머니에서 우연히 발견하기도 합니다.


친구와 자전거를 타고 진해로 가서 점심을 먹으며 이야기 끝에 이태리 여배우의 이름이 기억이 안나 돌아오는 길 내내 생각을 해도 가물거리기만 했는데 다음 날, 새벽 일어나 갑자기

" 아! 모니카 벨루치였지. "


설국의 작가 가와바다 야스나리는 노추를 보이기 싫다며 자살을 했습니다.  평생 미학을 추구했던 그였기에 개인이 선택한 최후에 비판의 여지는 없으나 젊은 날에는 내심 경박한 짓이라고 생각했지만 몸과 마음이 비루한 모습으로 주위에 이끌리며 살아가는 것보다 잔영(殘影)에 불과한 여생을 깨끗하게 잘라내는 것은 어쩌면 인간이기에 아름다운 태도가 아닌가 하고 가슴 한 켠이 서늘해 질 때도 있습니다.


돌 맞을 소리지만 늙은이가 에어로빅을 하네 주름살 수술을 하네 건강하게 아름답게 오래 살겠다고 버둥대는 모습이 곱게 보이지 않습니다.  모르지요. 저도 더 나이가 들면 이런 말을 못할지 모르지만 사람은 나이가 들면 체념도 배우고 죽음을 마음 한 구석에 접어 넣어 늘 삶의 동반으로 맞이 할 여유가 있어야 연륜의 근육이 부드럽고 탄탄해 진다고 믿습니다.


성인이 된 이후에 대취하여 골아 떨어지지 않은 다음에는 3시간 이상 수면을 취하지 못했는데 더욱 잠은 없어지고 꿈은 많아졌습니다.  이틀 전 새벽에는 부엉이 울음을 따라 산 속을 헤매다가 불빛을 발견하고 찾아간 주막에서 밥보다 급한 술을 청하고 허름한 봉놋방 벽에 등을 기대어 가쁜 숨을 추스렸습니다.

" 도대체 내가 어디로 가는 길이었지? "

마흔 초반으로 보이는 주모가 술상을 차려 왔습니다.  술 파는 아낙네 답지않게 초승달 같은 눈썹이 단정하고 말이 무거운 입술에 기품이 어려 있습니다.  그러나 표정은 한없이 어두워 보입니다.  돌아서는 주모에게 여기가 무슨 마을이냐고 묻습니다.  주모는 조용히 돌아서서 " 물트는 골.  돌아가도 나아가리. " 라고 합니다.


참 이상한 마을 이름도 다 있다고 생각하고 자작으로 마른 입술을 적시는데 봉놋방 구석에서 여울이 자갈을 딛고 흐르 듯, 나지막하고 묵직한 노래 소리가 들립니다.


" 어허! 벗님네여. 이 내 말을 들어보소.

  우리 가는 길에 신고난관(辛苦難關)없으랴만,

  정 이월(正二月)눈 바람이 매화꽃을 피우 듯이,

  물트는 골, 흘러내려 한바다로 가기까지, "


호롱불빛이 미치치않는 구석에 선손님이 있었습니다.  아직 어둠이 걷히지 않은 내 눈에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구겨진 옥색 바지 저고리 차림에 정좌를 하고 등을 꼿꼿하게 편 자세로 그 사람은 장타령 같기도 하고 선소리 같기도 한 노래를 부르고 있었습니다.  솜씨는 거칠고 가끔 한(恨)의 꼬리가 창법에 묻어 있기는 하지만 마치 천년동안 빙하에 갇혀 있던 얼음이 잔설을 헤치고 큰 강으로 나아가 듯 그 목소리는 봉놋방을 가득 채웠습니다.


" 바늘산 송곳 길은 포개어서 나아가고

  깊은 여울 큰 물결은 떠 밀어서 나아가고

  설산 한풍 시린 길은 보듬어서 나아가고

  물 없는 사막 길은 눈물 먹고 나아가고 "


거칠게 들이켜서 불콰한 눈으로 과객을 다시보니 짐작대로 노통입니다.  " 지가 먼저 쪼그린 주제에 무슨 염치로 저런 노래를 불러? " 하고 억지로 태연한 척 하지만 이미 취하여 이성이 마비된 눈에서 쉬임없이 눈물이 흐릅니다.  어머니가 별세하셨을 때에도 흘리지 않았던 눈물이 작은 내 몸 어디에 그렇게 엄청난 넓이로 숨어있었는지,---


 " 땅끝이 만리라면 부토(腐土)된 들 두려우며

   바다가 천길이면 손을 이어 당기리라.

   굶주려 죽은 넋. 맞아 죽은 넋. 얼어 영혼보다 먼저 죽은 넋 "


놀라 잠에서 깨여 납니다.  온 몸이 땀에 젖어 있습니다.  눈을 뜨면 우선 담배불을 당기는데 어디에서 몇 시에 잠이 들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그러다가 창에 여명이 이르고 다시 고삐가 행복한 일상. 마약처럼 행복한 일상으로 돌아 갑니다.  pmp로 영화를 봅니다.  마리 앙뜨와네뜨가 푸줏간 아낙네에게 쫓겨 마차의 바퀴가 걸리는 시대가 바로 오늘 같습니다.


글을 못 적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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