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서 보내는 빡쎈 인생 첫 추석 [짤방 및 잡솔 첨가]
2013.09.19 01:44
올해는 겪지 않아도 되는 교통체증.....
이제 12시 넘었으니 추석이 온건가요?
태어나 31년을 논산의 본가에서 추석을 보내다가 이번에 처음으로 서울에서 추석을 맞게 되었습니다.
이것저것 일들도 많고 할머니가 올라오시는 방향이 좋을거 같다고 의견이 모아져서 룰루랄라를 외치고 있었죠.
하지만 그 이면에는 아버지 및 작은아버지들과 고모들의 딜이 숨겨져 있었으니.......
할머니 모시고 오는 중대임무는 집안의 장손이자 종손이라는 듀얼코어 직함을 지닌 사람이 적당하겠다!!!
네.. 저에요....
뭐 어쩌겠습니까. 아버지가 아버지차 기름까지 가득 채워서 키 넘겨 주시는데....
9월 17일..
저의 본가는 논산입니다. 훈련소가 내려다 보이는 연무대 근처에는 고모도 살고 계시죠
거리는 고작해야 200킬로 정도 수준이지만 이게 또 한번 막히면 최대 26시간까지도 걸리더라구요
출발에 앞서 분기점이 나타나네요
1. 화요일 아침에 LTA A의 스피드로 황급주파수급 고속도로를 달린다!
2. 화요일 저녁에 퇴근한 고종사촌을 태우고 헬게이트를 통과한다!
아버지는 가는길에 태워가면 심심하지도 않고 좋지 않겠냐는 의견이셨지만
와이프님의 결사반대로 다행히 1번 테크를 타게 되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이건 잘 한 결정인거 같아요
이유는 저 아래쪽에 나오게 됩니다...
화요일 아침. 상쾌한 하늘을 바라볼.....일은 없고 전방주시의 의무를 다 하며 집에서 어느길로 갈까 루트를 짰습니다.
다시 분기점
1. 제2경인 - 영동 - 경부 - 천안논산 - 서논산IC
2. 서해안 - 국도 - 천안논산 - 서논산 IC
3. 제2경인 - 영동 - 중부 - 호남 - 연무 IC
이렇게 삽질하며 루트를 짜는 이유는 아버지 차는 제 모닝보다 월등히 고급차량임에도 불구하고
네비님이 실시간 교통정보를 제공해 주지 않습니다. 매립형이라 업데이트가 귀찮아서 자주 업데이트 못한것도 한몫...
언제 어디로 가던지 막히는데 먹을걸 준비해 가면 조금 덜 막히고 빈손으로 가면 왕창 막히는 루틴
이번 설에 3번 루트를 택해 조금 돌아가도 덜 막히게 가보자 하는 생각으로 달려봤는데
역대 시골 내려가는거 중에서 가장 시간이 짧게 걸렸었습니다.
아침이고..
설마 이 시간에 막히겠냐
그냥 네비가 가라는대로 가보자
이 3가지 조건을 조합해 결국 1번 루트를 타기는 했습니다.
모든게 순조로웠습니다.
영동타며 신갈까지 신나게 달리고
기흥 - 안성 모두 무사 통과
첫번째 헬게이트는 천안논산 고속도로에 진입하며 시작되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민자 고속도로를 싫어하는 편입니다. 이유는 단 하나... 비싸서....
풍세요금소를 지나 들어가자마자.. 눈앞에는 정겨운 차 뒷꽁무니의 향연이 펼쳐지고 있었습니다.
한 30분 빌빌거리며 가다가 보니...... 고속도로 포장공사를 하고 있네요.....
가뜩이나 좁은 천안논산인데... 1차선만 차가 다닐 수 있습니다........
그래도 별 수 없이 가야 해서 묵묵히 가다보니 정체는 거짓말같이 풀리고
저는 짜증에서 벗어난 홀가분한 마음으로 악셀을 힘껏 밟았습니다.
그리고 별 생각없이 달리다가 눈 앞으로 110 이라는 글자와 함께 카메라 같은게 슉 지나간 느낌이 나더라구요
도로변에 박아놓은 야매카메라가 아닌 도로에 달아놓은 카메라...
앞서 말한대로 아버지 차의 네비는 업데이트가 최신이 아니었습니다............
평소에는 네비가 카메라를 다 잡아줘서 그냥 그렇게 다녔는데.
130쯤 밟고 가다가 슉 지나가는 카메라를 보니 -ㅂ- 난 이제 엄마한테 죽었구나... 어머니는 과속이 싫다고 하셨어.....
뭐 한 30초 고민하다가 내 차도 아닌데 하는 생각으로 그냥 계속 밟았어요.
영동에 마성터널이 있다면 천안논산에는 차령터널과 정우터널이 있죠
다들 한번 막히기 시작하면 답 없는 코스인데 그날은 왜 그리도 빵빵 뚫리는지 신이나서 카메라에 또 찍힐 판이었습니다.
중간에 휴게소에서 한 30분을 잤음에도 불구하고 8시에 출발해 서논산 IC 찍고 나온 시간이 11시10분.
할머니댁에 가기 전에 연무대 고모댁에 들러 선물을 내려놓고 차를 몰고 나오다 보니
전설의 용사님네 본거지가 보입니다. 같이 왔으면 차비는 아꼈을것을.....
그 다음 코스로 작은할아버지댁에 들러 선물 증정
12시경 시골본가에 도착해 할머니하고 같이 럭셔리한 점심식사를 했습니다.
+8 고봉밥 , 열무김치(신맛 +2) , 방금 담은 걷절이(풋내 +5), 작년 김장김치(신맛 +8), 고추장, 정체불명 된장시래기국
안그래도 고봉밥인데 할머니 전매특허 "일 해야하는디 더 먹어야 햐" 스킬이 발동되어 밥을 평소 먹던거 한 2.5배 먹었나봐요
밥 먹고 숨을 좀 돌려야 하는데 본격적인 미션이 하나씩 떨어지시 시작합니다.
1. " 쩌그 윗잔딍이 아람네 가먼 기스배 한상자 줄거여. 가서 받아와. "
아람이네가 어디일까요...... 다시 할머니꼐 물어 봅니다.
"아람네 모르냐아? 차아암..나... 윗잔딍이 감나무 있는디여"
아... 감나무.......
대충 위치를 잡습니다. 그리고 후딱 갔다올 생각에 출발합니다.
그리고 약 5분 후 저는 크나큰 멘붕에 빠지게 됩니다....
"기스배" 라는 멘트를 눈여겨 듣지 않았던 문제일까요?
제 앞에 내려진 상자는 이삿짐 센터용 노란 강화스파스틱 상자고.. 그 안에는 살살 기스난 배들이 한 30개 담겨 있었습니다.
그리고 눈물나게 고맙게도 그 집 아줌니가 "지사지낼때 써어" 라며 곱고 기스없는 상품 배를 5개 얹어주십니다.......
2리터 생수 6개 묶음 양손에 하나씩 들고 걸어갈 때 느꼈던 힘듬은 그냥 커피네요...
가게에서 파는 배만 생각하며 무방비로 온 제 자신을 탓해 봅니다......
끽 해야 300미터 정도 밖에 안되는 거리인데 한 4번 쉰거 같더라구요. 눈물나는 배 ㅜ.ㅜ
그렇게 땀을 범벅을 해서 집에 도착해 차 트렁크에 배 상자를 넣고 나서 저는 또 한번 멘붕에 빠집니다.
"그냥 자 가지고 가면 되는거잖아...." 라고....
옥상에 올라가 니코틴을 보충합니다...
할머니의 2번쨰 미션이 하달됩니다.
"작음마네 포도바티 가먼 포도 줄거여. 받아와. 그리고 이 돈 꼭 주고와야한다. "
위치 아니까. 포도 받아오는 느낌 아니까! 차 시동걸고 바로 달렸습니다.
포도밭에 가니 정신없이 포도들을 상자에 담고 계신 작은할아버지와 작은할머니가 보입니다.
차 뒷좌석을 열고 신문지를 깔고 포도상자를 6개 싣고 주머니에 손을 넣는 순간 작은할머니의 눈이 번뜩이시네요
"아.. 성은 왜 너헌티 이런거 시키고 그런다냐. 할머니헌티 가서 포도값 안줘도 된다고 햐"
시골인심 크리가 터집니다.... 할머니는 무조건 주고 와야 한다. 작은할머니는 안받는다....
더군다나 작은할머니 몸빼바지에는 그 흔한 주머니 한개가 안보이는 급박한 상황.
제가 못드리고 오면 할머니가 직접 가겨서 드리고 오실거라는거 느낌 아니까!
차 시동 걸고 준비 다 해놓은 상태에서 작은할머니한테 접근해 손을 꼭 잡아 드리며 그 손에 포도값을 재빨리 쥐어드리고
"저 가볼게요" 멘트와 함께 바람과 같이 차 안으로 굴러들어와 집으로 왔습니다.
시골에서 가장 힘든건 다른집이나 친척집 가서 과일이나 농산물 받아올 때 값 치르는거 같네요 ㅜ.ㅜ
그렇게 두번째 미션을 마치고 집으로 와 다시 차 대놓고 부엌으로 가니 할머니의 세번째 미션
"승대야아, 이게 뭐다냐아? 너 이런거 먹냐아?"
라며 냉장고에 있는 냉면을 10개정도 꺼내시네요........
꽁꽁 언 육수, 말라 비틀어진 면......
그래도 손자의 사명은 할머니를 기쁘게 해드리는것. 무조건 먹겠다고 하고 비닐봉지에 주섬주섬 담았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반복문 "너 이런거도 먹냐아?"
더위사냥 2개, 비비빅 4개..... 교회 권사님이 사다놓고 가신거라고 하시네요
가져가면 녹으니 그냥 여기서 한개씩 먹는다고 하고 쉽게 넘어갔습니다.
문제는 다음 질문에서 발생되었습니다.
"승대야아, 아까 즘슴때 시라구국 맛나냐?"
제가 가장 싫어하는 할머니의 질문입니다.....
맛있다고 하면 서울가서 해먹으라고 그동안 쟁여놓으신거 다 꺼내실거고
맛 없다고 해본적은 없지만 만약 그러면..... 삐지시고........
어떻게 합니까. 맛있었다고 해야죠 ㅜ.ㅜ
그리고 결과는 역시 예상대로 나왔습니다.
창고쪽에 잔뜩 있던 시래기들을 다 꺼내오셔서 가마솥에 넣고 데치기 시작하시네요
아아 -_-;;;;
사실 맛 없었어요 할머니...... 된장맛만 났어요 ㅜ.ㅜ
하지만 시래기들은 속절없이 가마솥 안으로 번지점프를 하고 시래기들을 다 쏟아넣으신 할머니는 제게 다음 미션을 주십니다.
"고추바티보먼 호박 심어논거 있어, 느 댁 호박 먹냐?"
"호박... 네 먹죠"
"이~ 그라믄 고추바티가서 느 꺼랑 아브지 줄거 큰거 두개 따와아"
"네"
단순하죠?
그리고 약 20분 후 저는 반팔에 반바지 차림으로 호박을 따러 들어가서 풀독이 제대로 올라 물파스와 버물리를 양손에 들고
양팔과 다리에 쳐발쳐발하며 긁어대다가 작은할머니댁의 현대화된 화장실로 뛰어들어가 찬물로 샤워를 10분간 하게 됩니다.
단연컨데 풀독은 가장 완벽하게 사람을 환장하게 만드는 독입니다.
그 난리를 치고 다시 집으로 와서 다음 미션을 받았습니다.
1. "뒤껴티가먼 땅콩 있응게 비니루 가지고 가서 다 담아와아"
2. "대추나무에 대추 영근거 골라서 비니루 가지고 가서 다 따와아"
3. "광에가먼 쌀 쪄놓은거 있어어, 그거 꺼내와아"
비교적 저난이도 노가다였기에 금방 다 끝내고 부엌으로 돌아오니 할머니가 한과랑 모나카랑 약과를 꺼내놓으셨네요
최근에는 두유나 쌀튀밥 아니면 시골갈때 아무도 그런 달달한 과자류를 사가지 않아서 어디서 난건가 여쭤봤습니다.
제 결혼식때 동네사람들 나눠주고 남은거 얼려놓으신거라고 하시네요
냉장고에서 17개월 묵은 간식거리 되겠습니다...........
집에 오면서 운전하다가 결국 다 집어먹었죠
다시 미션으로 돌아와서 다음미션
1. 냉장고에서 배추김치 담은거 꺼내서 차에 실어라
2. 냉장고에서 열무김치 담은거 꺼내서 차에 실어라
3. 냉동실에서 생선이랑 부침가루(?) 꺼내서 차에 실어라
4. 창고 서브냉장고에 있는 팥, 수수, 간장을 차에 실어라
아 -_- 그랜저에 사람 탈 곳이 없을 정도로 물건 싣고
할머니도 옷 갈아입으시고 가방 챙기시길래 슬슬 갈 준비 하고 있는데 마지막 미션이 벼락같이 떨어집니다.
"현관이 사과박스 있잖여, 한개는 느 댁 입덧헌다니 가서 먹고 한개는 아부지 집에 내려놔아"
아..
사과박스........
좀 커요 ㅜ.ㅜ
이미 차에 테트리스는 끝난 상태.......
다시 뒷좌석에 있는 짐들 일부 꺼내고 사과박스 넣고 테트리스 다시 실행
이럴때는 스타렉스 3밴 같은거 한대 몰고 시골 가고 싶어요 ㅜ.ㅜ
어찌어찌 준비 다 하고 차를 빼서 서울로 올라가려고 집을 나서는데
할머니가 작은할머니한테 약 치는거 부탁해야 한다고 들렀다 가자고 하시네요
왠지 불안... 아까 도망왔는데.....
다시 포도밭으로 향합니다. 차를 세우고 포토하우스로 접근하는데.. 역시나 다투시는 소리가 나네요
"성! 왜이랴아~~ 승대시켜서 나 포도값 주라고 했다머?"
"아 받아아아~ 만날 가따먹는디 돈 줘야지"
"성 나 이돈 못받응게 다시 가지가아"
"차아암~나! 왜이랴아!"
아 -_- 시골표 실랑이..... 돈을 줘도 문제......
결국 작은할머니는 포도값을 도로 와이프 맛난거 사주라고 제 손에 쥐어주십니다
여기까지 쓰니 막 피곤해지네요
결국 그렇게 서울로 출발해서 온길 다시 되짚어 왔습니다.
서논산IC - 풍세요금소 - 천안에서 경부 - 안성에서 평택제천 - 화성동탄 - 경수산업도로
거짓말같이 길이 하나도 안막혀서 휴게소 한번 안들르고 서울집에 도착했다는 해피 엔딩으로 끝나는듯... 했는데....
9월 18일...
미션1. 아침 일찍 부천에 계시는 고모댁에 가서 고모님을 모셔와라
일단 고모님은 모시고 왔습니다.
그리고 음식들을 준비 해야 하는데 라인업이 안나오는 사태가 발생
1. 총감독 할머니 신월동에 고모할머니 댁으로 나들이
2. 작은어머니1 사고로 입원
3. 작은어머니2 항암치료
4. 며느리 폭풍입덧
주방보조 겸 식자재조달팀 팀장으로 임명된 저는 오전 내내 시장 돌아다니며 이것저것 사며 사람들에게 시달렸습니다.
평소에는 한산한 시장이 무슨 크리스마스의 명동마냥 걷기도 힘들 정도로 사람이 넘쳐나네요
에니웨이
이렇게 서울에서 보내는 첫 추석을 맞이하고 있는 백군입니다........
맥주를 한캔 했더니 알딸딸하니 잠이 안오네요
모두들 추석 즐겁고 행복하게 보내세요 ㅜ.ㅜ
코멘트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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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초보
09.19 0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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ㅋㅋ 좋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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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배
09.19 05:51
충청도 할무이 손자 사랑이 대단하십니다....
연무대.. 참 좋은 동네죠..(거기 사는 츠자와 진한 첫사랑의 추억이..^^;;)
고생하셨습니다.....
명절이니까 .. 그쵸..?..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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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l5brj
09.19 05:54
추천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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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도 힘들었을게야~~
어쨌든 명절 잘보내 ^^ 명절지나고 함 보세ㅋ -
수빈아빠처리짱
09.19 12:11
즐거운 명절 되세요 -
고생하셨네요..ㅋㅋ
저 어릴 때 큰집 가면 꼭 쌀 한가마(80kg) 차에 넣어 주시고 감 1포대에 채소를 차 가득
실어 주시던 큰아버지 생각이 많이 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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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포넷
09.20 15:44
진짜로 풍성한 추석이네요...
ㅋ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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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담가로 나갔어야 했어.
무진장 부럽습니다.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