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 한글은 세종대왕님이 독자 개발하신 건가요?
2014.01.19 23:46
집현전에서 열라 거부했었다네요.
사실인 것 같은데, 무식이 하늘을 찔렀네요. -_-;
그래서 잘시 검색을 통해 조사와 검증중입니다.
황희가 탐관 오리였다는~ TT
코멘트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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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NotDisturb
01.20 0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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쏭
01.20 00:28
실록에도 안나오고, 서문에도 직접 자신이 만들었다고만 적혀 있다고 해서.. 독자 개발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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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보시면 될겁니다. 연구 프로잭트 진행후 논문 낼때 그 이론을 발견한 사람은 책임저자 및 제1저가가 되니까요. 세종대왕이 한글 프로잭트 하면서 책임저자와 제1저자로 등록되서 발견자라고 보시면 될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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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주식회사
01.20 08:42
ㅎㅎㅎ
심하게 이야기하면 조선사는 거의 반대로 보시면 됩니다.
세종대왕 한글 창제는 요즘은 거의 독자 창제설로 보고 해례본을 집현전 학자들에게 시켰다고 합니다.
황희는 탐관오리는 둘째치고 그 식솔들이 매관매직, 살인 등을 했다는데, 당시는 엄격하게 신분제가 존재할 때라서...하지만 우리 알고 있는 것과는 너무 거리가 있죠.
유학의 선구자로 보는 사람들은 또 어떠합니까? 경신대기근으로 100만명 백성들이 굶어 주는데 좋게 말해서 예송논쟁이지 지들 밥그릇만 챙겼는데, 교과서나 박물관이나 가면 위인으로 추앙받죠. 물론 위인전도 있구요. 유학의 선구자인 송시열 중심으로 벌어진 일이죠.
그런데 그게 한번입니까? 을병대기근때는 130만명 굶어 나갔습니다. 아사자가 백만명이면 말이 살아있지 그 2~3배는 영양실조였나 발육부진이 다반사였을 것입니다. 당시 인구수를 고려해서..아니 수구들이 주장하는 호패법에 향소부곡민이나 천민 숫자가 빠졌다고 하지요. 그래서 경신대기근 때 500만명이 아니라 1200~1300만명으로 보고 있어요. 그래도 7%가 넘습니다.
을병 대기근때도 그런 주장하는데, 17세기 초까지 노비의 비중이 60% 정점을 이루다가 줄어들기 시작합니다. 기근과 무정치로 인해 소위 빚노비가 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호패법 덕분에 도주해도 살 길이 없었구요. 정치를 잘해서 신분제 사회가 잘 지켜진 게 아닙니다. 그런데 을병 대기근이 언제 발생했나요? 조선 후기에서 부흥기라고 하는 숙종 때 입니다. 또한 붕당정치로도 유명했던 시절이죠. 그런데 우리는 대단한 유학자들만 배웠지 을병대기근에 대해서는 한줄도 못 배웠습니다. 당시 호패법으로 추산되던 인구가 615만명 가량됩니다. 18세기에 들어서는 노비가 40%이하로 줄어들기 시작하니 17세기 후반 수구 세력의 주장대로 50%로 산출해도 1200만명 중에 130만명 그냥 굶어 죽은 것입니다. 그러나 호패법에서도 포함시키지 않는 노비와 향소부곡민들을 아사자 인구 조사에는 포함시켜서 조사했다는 주장도 말이 안된다고 하는 의견도 있다는 점입니다. 어느 쪽이 설득력이 있는지는 각자 판단하세요.
하지만 당시 여자 노비는 2명 혹은 남자 노비 3명이 소 한마리와 바꾸는 가격이었습니다. 소, 돼지와 같이 가축 취급하던 시절에 그들을 인구로 봐서 조사했다? 재물 피해 조사라면 몰라도...그리고 향소부곡민이 조선 후기에 과연 얼마나 있었을까요? 향소부곡민들은 말 그대로 정복 사업으로 잡아온 포로들입니다. 조선이 명, 청시대 때 뭘 정벌했나요? 여진 정벌요? 조선초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그 곳은 여진족이 얼마 살지도 않았습니다. 그나마 있다면 예맥계 말갈로 극소수의 속말말갈과 백산 말갈입니다. 교과서에는 귀속 혹은 귀화인으로 배우는데, 고조선, 고구려, 부여, 발해를 우리 조상이라고 배우면서 지금이 조선시대도 아닌데, 귀화인으로 표현하는 것도 웃기고, 예맥족이 사실살 백산 말갈과 속말말갈인데, 마치 말갈족과 구분하여 배우는 것도 웃기는 일입니다.
어쨌든 130만명 굶어주는 동안에 청이 보다 못해 불쌍해서 우리가 쌀을 준다는데도 거절합니다. 물론 경신대기근 때도 영의정이라는 허적을 비롯해서 다른 나라 즉 오랑캐(청)에게 도움을 받을 수 없다고 거절합니다. 덕분에 100만명 돌아가시고, 얼마 안 있어 을병 대기근이 왔음에도 마찬가지 논쟁을 수년간 합니다. 청나라가 3만석을 지원해줍니다. 1만석은 무료로 주었죠. 그런데 경신대기근(1670-1671)이고, 을병대기근(1695-1699)입니다. 그런데 청나라가 경신때도 도와준다고 했는데, 도대체 무슨 나라가 쌀 지원 받는 주제에 30년 걸리는지...그러면서 당시의 왕을 성군이라고 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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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런 통계들의 근거도 궁금합니다.
인도의 예를 들면 어떤 지역에 기근이 발생하면 그 지역의 왕이 다른 지역의 왕에게서 쌀을 사다가 지역민(모든 계층의 사람들)을 살렸거든요.
조선처럼 안정된 왕권이 있는 나라에서 사람들이 죽어 전염병이 창궐하거나 유랑민, 산적이 되는 걸 방치했을까요?
폐해도 있지만 잘 된 부분도 많은 나라 아니었던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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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스틴
01.20 10:34
조선왕조실록, 현종실록, 현종개수실록등을 분석하여 그 자료를 수치화 한걸껍니다.재미있게도 저희가 배웠던 국사 책등에서는 이런 내용이 거의 없지요.조선처럼 안정된 왕권이 거의 붕괴 수준까지 갔었던 사건이었습니다.한국 역사상 전대미문의 대 기근 사건이었고,임진왜란을 겪은 노인들 조차 차라리 왜란때가 더 나았다고 말할 정도였으니까요.관련 기록들을 보면 성서에 적힌 묵시록을 보는듯한 느낌을 받습니다.부모들이 아이들을 죽이거나 잡아먹고, 자식이 부모를 버리고, 남편이 죽었는데 아내는 그 옆에 있는 죽그륵을 먹는데 혈안이 되고... 당시엔 이러한 사건들이 너무 흔해서 충격도 받지 않는 내용들이었다고 하네요.이러한 영향력으로 피폐해진 국가의 상황이 회복되는데는 상당한 기간이 걸렸고,조선이 멸망한 원인을 이러한 사건으로 인한 영향력이조선 말기에나 겨우 회복 되었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도 있습니다.이러한 기근의 영향이 발생한 원인으로는 전세계적으로 소빙기 시기로서.태양의 흑점 활동이 줄어들어서 지구의 기온이 몇도 내려간 시기였는데...현재 태양의 흑점 활동이 줄어들어서 다시 몇십년 안에 소빙기가 도래 할꺼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소빙기가 도래하면 전세계 식량 생산의 감소가 큰 문제가 될 가능성도 있습니다. -
행복주식회사
01.20 11:45
그 왕권이라는 게 자신들 향락과 대신들의 가문 유지 및 부정부패를 위해 필요한 거였죠.
조선의 양반이요? 순조 이후 외척이 어떠했는지 조금만 봐도 알텐데요. 그런데 양반가로 배우고, 심지어 현재 국고로 보조금 줘가면서 보존해주고, 후손들에게 관리비 명목으로 돈이 나갑니다. 그러면서 지금의 친일, 친미 나아가 부정부패 정치인 논하는 게 정상적인 상황인지...이미 묵혀 묵힌 일입니다.
조선의 정치사를 너무 크게 보지 마세요. 그 잘되었다고 배운 붕당 정치나 예송 문제가 바로 그 시절에 을병대기근과 경신대기근을 겪었던 시절에 있었던 일입니다. 국민은 모두 굶어주는데, 이게 장자니 아니니...가지고 지들끼리 싸우고..우리는 그것을 유학의 시초라 해서 계보를 외워야 대학을 갈 수 있어요. 그리고 공무원 시험을 위해서도 외워야 합니다. 무슨 부패/무능 공무원 외워야 대학과 공무원이 되는 게 웃기는 일 아닌가요?
조선 후기는 거의 국가 정비 체제가 완전히 무너진 병든 사회였습니다. 뭐 조선 전기도 크게 다르지 않지만요.
일단 길모어라는 외국인에 의한 기록을 보면 1887년 역관이라고 나온 이채연은 영어를 전혀 할 줄 모르는 얼간이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역관이 외국어를 못한다?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요? 이게 제대로 된 나라인가요?
같은 공사로 나온 박정양은 몸에서 악취가 나는데, 음식, 담배는 물론이고, 오줌, 똥 냄새가 진동해서 대화조차 어려웠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1등석이라고 탄 선실은 더려운 건 말 것도 없고 배 전체가 너무 더러웠다고 합니다.
그리고 궁 이야기를 하셨는데, 경북궁 담장, 광화문 광장, 종묘 광장은 똥과 오물로 가득해서 봄부터 가을까지 도저히 걸어다닐수 없었다고 서양인 뿐만 아니라 박지원 연암집 예덕 선생전에 있고 승정원 일기에 보면 영조 27년에 홍수로 인해 배수로 하천을 막아 오물이 넘쳤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이야기한 내용이 더 어처구니 없습니다. 토사가 유실돼 하수로를 막았으면 이를 고쳐야 하는데, 그게 아니라 성군으로 알려진 영조와 그 대신들은 "도성 안에 백성이 너무 많다"고 한탄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즉 도성에는 잘 사는 사람들만 살아야 하는데 백성이 너무 많이 들어와 도성을 더렵혔다고 생각하고 이를 한탄했다고 하지요.
더 충격적인 건 서울대 인류학/고병리 연구실 신동훈 교수팀은 경복궁 및 일대 지층 조사에서 조선지층대에서 회충, 편충, 편충의 기생충 알이 다량 발견되어 당시 길거리에 분뇨가 많이 버려졌음을 확인했다고 발표한 논문도 있습니다. 문제는 경북궁 앞에서 추출한 흙에서 165/1g이 나왔고 평균 35개 알이 검출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상황이 이런데 제대로된 국가 체제를 갖출리 없어요. 이 정도의 기생충이라면 전염병이 얼마나 심했을까요? 이러한 내용은 서양 선교사들이 촬영한 구한말 광화문 및 육조의 사진에서도 확인되는 내용입니다. 바닥에 분뇨가 한두개가 아니라 그냥 걸으면 밟힐 정도로 있습니다.
이걸 왜 방치했는지 뻔합니다. 이미 조선의 임란을 통해 국고가 모두 바닥난 상태입니다. 광해군의 공명첩에서 이미 알수 있듯이 조선왕조는 임란을 통해 바닥난 국고를 공명첩을 통해 마련코자 했지요. 그리고 이게 시행되는 과정에서 왕만 거지가 아니라 양반도 별반 다를 게 없었던 탓에 매관매직으로 변질되고, 이름만 되어도 알만한 위인들이 모두 연류되어 있습니다.
그 뒤를 이은 인조는 어떠합니까? 공녀 문제는 둘째치고라도 호란으로 인해 나라 꼴이 엉망이 되었죠. 그게 개선될리 없습니다. 나라가 정비가 잘되서 노비가 중기에 늘어난 것이 아니라 호패로 인해 예속되면서 빚노비가 급격히 늘었던 것입니다. 조선초 10%에 불과하던 노비가 중기에 이르러 60%에 이릅니다. 자식 낳는 기계도 아니고, 무슨 노비가 이렇게 급격히 늘어나나요? 임란과 호란을 겪었는데 말이죠. 태평성대라는 건 예나 지금이나 있는 사람들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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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초보
01.21 02:36
꿈보다 해몽인지 몰라도 한글 창제에 들어간 한/중언어학적 지식이나 음운론 지식이 하늘을 찌른다고 합니다. 그런 엄청난 지식이 세종대왕 한사람의 지식일 리는 만무하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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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주식회사
01.21 08:08
심증은 그러하나 최근 사학계에서는 세종대왕 독자 개발설로 보더라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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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계에서는 그러하나 학계라고 또 너무 믿을 건 못되는게 아닌가 생각도 조심스럽게 해봅니다.
저 같은 경우에는 왕초보님의 의견에 +1 하는 의견입니다.
지금까지 알려진 한글의 과학성 및 우수성을 따져본다고 하여도 한 개인에게서 나오기는 좀 무리가 아닌가 싶습니다.
정말 그렇다면 세종대왕은 왕이라는 자리가 아까운(?) 인물이 되었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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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주식회사
01.21 08:35
저 역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심증만으로 단정할 수 없으니까요. 하다못해 지푸라기 같은 근거라도 뭐가 있어야 하죠. 심증만으로만 주장할 순 없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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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자료라도 어떤 시각으로 어떤 각도에서 보느냐에 따라 해석이 달라질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어떤 학자라도 절대적인 객관성을 가질 수는 없겠죠.
그래서 여럿이 모여서 연구하는 것이겠습니다만 어쨋든 사람들이니 절대 객관성을 가지고 자료를 해석할 수가 없죠
그리고 해석하는 자료도 결국은 그 당시 집현전 CCTV 돌려보는 상황이 아니기 때문에,
몇 안되는 문서자료와 정치적 상황과 역사적 자료를 토대로 만들어가는,
즉, 가장 신빙성있고 믿을만한 가설을 '만드는' 것이 현재까지 학문의 한계점이기 때문에
그저 '전문가들이 그랬댄다', 그러면 '그런가보다' 하는 것이 현재까지 상황이죠.
접할 수 있는 정보와 자료가 전문인들 수준으로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가 접할 수 없고 그래서 가르쳐 주는 대로 배울 수 밖에 없을 뿐이지
만약, 만~~~~~약에 무슨 이유로든 공개가 된다면 (그럴 일이야 없겠지만)
그 땐 또 모르는 일이라고 봅니다.
일례로 전 광우병 사태를 들고 싶습니다.
접할 수 있는 정보가 제한되어 있었다면 광우병사태는 정부가 충분히 통제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기 때문에 온 국민이 광우병에 관한 전문가가 되고,
정부에서, 또 소위 전문가들이 시사대담프로에 나와서 하는 말들이 얼마나 얼토당토 않은 말인지
미국 협상전문가들이 도대체 뭔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들을 하는지 다 알게 되지 않았습니까?
힘이 없어서 광우병 사태가 지금에 이르렀지,
만약에 단순 지식 정보 파급 정도로만 따졌다면 한국 국민들이 이기고도 남았죠.
정보를 제한하는 것은 제한하는 만큼 쥐고 있는 쪽이 권력이 생기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유가 무엇이 되었건...
지금 우리에게 심증밖에 없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사실 그것으로 시작하는 것이라고도 생각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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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주식회사
01.21 13:15
일단 세종대왕의 독자 개발의 주장은 일부 사료를 통해 인정되고 있는 부분입니다.
CCTV로 봐야 믿는다는 식이면...과연 역사 중에 믿을 수 있는게 뭐가 있나요? 허허허
마치 방사성 탄소연대법도 믿지 못한다..내 눈으로 봐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과 달라보이지 않네요.
세종대왕 한글 독자 개발설과 광우병 사태와 비교하는 건 말이 되지 않네요. 세종대왕 한글 독자 개발설과 관련한 실록이나 문헌은 한국 고문헌 연구회나 하다못해 국립도서관에 가보셔도 모두 공개되어 있습니다. 세종대왕 당시에 언론 통제해서 한글 창제가 본인의 업적으로 했다는 주장이신가요? 당시 신숙주를 비롯해서 한글 창제에 대해서 모두 반대했었습니다. 해례본 작성도 수치스러워 해서 모두 안 하려고 했습니다.
세종대왕의 독자 개발설이 아니라고 생각되신다면 심증적 논리로 주장을 펴시거나 다른 비유를 들지 마시고, 지푸라기 같은 반증이라도 들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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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제 의견을 입증할 만한 근거가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근거가 없을 수 밖에 없는 이유를 설명하려고 한 것입니다.
이것을 이해 못하신다면 대화가 정상적으로 진행될 수가 없지요.
학문적 가설을 입증하고 반증하는 입장에서
어떠한 가설에 반대하는 의견이 정확하게 설명이 되어야 해당 가설이 틀렸음을 증명할 수 있다고
생각하시는 의견에는 동의하는 부분이 없지는 않으나
그러한 시각으로 해당 주제를 바라보는 사람만 있는 것은 아니며
그러한 시각으로 해당 주제를 설명해야만 이 게시판에 글을 올릴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리고 위에서 말했듯,
어차피 옆에서 지켜본 바가 아닌 바에야 이런 것은 언제까지나 '가설' 로 남을 수 밖에 없습니다.
이것을 가지고 내가 CCTV 못 돌려봤으니 못 믿겠다! 라고 말하는 것으로 해석하시는 것은 좀 무리가 아닐런지요?
세상의 많은 이슈들 중에는 심증에서 시작하여 증거를 찾아간 예도 많이 있습니다.
그리고 심증을 제시한 사람이 반드시 그 증거를 제시하면 좋겠으나, 그렇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증거가 없기 때문에 심증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시각은 학문적으로는 좋은 시각일 수 있으나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편협하게 보일수도 있습니다.
본인의 지식과 논리가 방대하고 상세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그것이 부족하다고 하여서 말도 안된다고 치부해 버리는 것은 좀 그렇지 않나 생각해 봅니다.
여기가 학문적 논쟁을 벌이는 곳도 아니고,
자연스레 자기가 하고 싶은 말, 자기가 생각하는 바를 말하는 곳이 아니었던가요?
서로가 말하는 바를 인정하면서 대화를 해 나갈 때 debate 가 정당하게 설수 있다고 봅니다.
참고로 제가 드린 말씀에 대해서 좀 덧붙이자면
광우병 이야기를 세종대왕이 언론통제한 것으로 해석하셨다면
제가 글을 잘못 썼던지 행복주식회사님께서 해석을 잘못하셨던지 둘 중 하나겠네요.
그 밑에도 썼습니다만,
광우병에 관한 지식은 원한다면 얼마든지 찾을 수 있는 정보이고,
그에 비하면 아무리 오픈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고문헌 자료는 광우병만큼 오픈되어 있지 않죠. 외국의 사례도 많고.
그리고 공개된 자료라고 하더라도 자료의 양 또한 매우 적은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한 면에서 광우병의 예를 든 것인데, 세종대왕이 언론통제했다는 말은 좀 비약이 심한듯 싶습니다.
그런 식으로 제가 쓴 것 같지는 않은데, 일부로 꼬투리를 잡으시는 듯 하군요.
그리고 좀 곁가지입니다만, 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법이 얼마나 오류가 많고
말도 안되는 엉뚱한 연대 결과를 뱉어내는지는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지요.
인터넷 조금만 뒤져보셔도 알 수 있습니다.
참, 그리고 역사중에 믿을게 뭐가 있나요? 하셔서 드리는 말씀인데,
역사는 패권자에 의해서 쓰여진 것이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입니다.
못 믿을거, 되게 많아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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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주식회사
01.22 05:58
계속 같은 말만 되풀이 되겠네요.
세종대왕 독자개발설에 대하 심증적 의심은 저 역시 동의 하는 바입니다.
학문의 가설을 세우는 건 역시나 중요한 과정 중 하나입니다. 이것 또한 누구나 동의하는 일반 사항이죠.
그런데 그걸 입증할 증거는 하나도 없다?
이렇게 하시고 유사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예를 들면 의심은 더 늘겠지만 어디까지 믿을수 있을까요?
확대시켜 논점을 흐리는 것 밖에 안됩니다. 반박하시려면 직접적인 논증을 이야기하셔야 논의가 되고 그래야 가설도 설득력을 얻는 거 아니겠습니까?
인문학도 가설후 사료나 유물로 가설을 증명하고 자연과학도 가설후 실험 데이타를 내놓지 랂습니까?
그러지 못하면 어떤 것인지 아시지 않습니까? 여기에 동의할 정도의 심증이 가도 이를 신뢰할수 없지요.
아울러 증거없이 심증만으로 범인을 잡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제대로 논의가 되려면 독자개발설에 반하는 뭔가 있어야 자신의 주장이 설득력이 있지 유사 사례가 이러니 이것도 이럴 거야 하는 건 그냥 소설이죠.
ps. 역사가 승자의 기록이나 지근 논쟁은 전쟁과 정치사 문제가 아니니 전혀 없다고 볼수 없으나 승자의 논리를 펼만큼의 사안 같지도 않습니다.
그리고 승자의 논리라고 해도 뭔가 지푸라기 같은 반박되는 기록이나 유물을 조금이라도 가지고 시작하지 다짜고짜 시작하지 않습니다. -
그러세요 그럼
너무 정색을 하시니 재미가 없네요
모든 것을 학문이니 논쟁이니 이것이 반증인지 가설인지 정당한지 사안인지 아닌지
하실 필요는 없을 것 같네요
여기가 사학계 전문인들이 모여서
해당 사안에 관한 열띤 논쟁을 펴는 곳이라면 모를까
전 행복주식회사님께서 자랑하시는 것 이상으로는 보이지가 않네요
제 인격이 안되나 봅니다.
제가 믿고 싶은 것도 그렇게 생각한다고 함부로 말도 못하겠군요.
사람들이 논리 참 좋아하는데요,
원래
논리라는 놈도, 논리를 drive 하고 control 하는 놈이 뒤에 숨어 있답니다.
그리고 제가 뒤에 덧붙인 것들은 말입니다.
(예를 들면 방사성 연대법이나 역사에 관한 것 등)
그것을 예로 드셨기 때문에 굳이 언급한 것이지 현재 사안과 직접적으로 연관시키려는 것은 아닌데요,
너무 그런 쪽으로 몰아가시는 것 같습니다.
아무튼
잘 아시는 분들께서 제가 가지고 있는 생각은
언급할 가치도 없는 생각이라고 증거해 주시니
이 주제에 관해서는 저는 이제 입을 닫도록 하겠습니다. ^^
참,
가는 길에 링크 하나 드리고 갑니다.
그 좋아하시는 '증거' 가 되실런지 모르겠네요. 까다로우셔서 증거가 아마 되기는 힘들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sunonthetree&logNo=11003592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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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강욱
01.22 11:30
자자, 진정들 하세요.
저의 짧은 지식으로 논란을 일으켰네요.
전, 두 분의 모두 지식과 사고 방식 모두 존중합니다.
다르다면 그 뿐일뿐, 그 이상 그 이하의 의미도 없습니다.
---------------------- 절 취 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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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주식회사
01.22 15:47
블로그의 원문은 2회 연재물이었네요.
1부 http://www.sciencetimes.co.kr/article.do?atidx=0000027756
인용하신 것과 같은 내용인데, 결론은 2부에 있네요.
2부 http://www.sciencetimes.co.kr/article.do?atidx=0000027856
글쓴이 스스로 신미대사와 한글 창제에 대해 어떠한지 마지막 3줄이 결론 짓고 있네요.
더 이상 논쟁은 무의미하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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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강욱
01.21 13:13
세종대왕이 어떤 인물이었나요? (진짜 궁금해서~~~)
일단, 다빈치 같은 인물들도 간 분야의 지식을 개인이 총망라한 인물로 봐도 되지 않을까요?
그럼 왕이란 것이 되기 위해서는 각 계의 언어를 이해할 만큼의 소양을 쌓기 위해 엄청난 공부를 하는 자리라는 걸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세종대왕이 그만한 수재를 넘어선 천재였다면 개인이 불가능할 것 같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만, 1) 무에서 유를 창조했느냐, 2) 많은 레퍼런스를 연구하여 언어의 근본을 꿰뚫고 문자를 만들었느냐, 아니면 3) 베꼈느냐
의 차원에서는 3번만 아니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2번과 3번의 갭의 차이가 얼마냐가 중요하겠지만서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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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초보
01.22 01:32
한글의 과학성 한가지만 놓고 보더라도, 한글의 개발은 한사람으로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한세대에서 개발될 것도 아니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몇백년이상의 기간동안 그 언어를 사용하는 매우 많은 사람들에 의해 사용되어지고 개선되어져야만이 가능한 것이죠. 세종대왕이 그런 것을 발굴해서 보급하는데 앞장섰다면 설득력이 있지만, 혼자서 이걸 시작해서 마무리 지었다는 것은 상식밖입니다. 우리나라 사학계의 행보를 보면 그 의견에 매우 신뢰가 가기는 합니다만.
한글의 과학성을 "우연"이었다고 치부할 수 있다면.. 가능한 일이기는 하지요.
한글이 세종 즉위 25년에 발표되었고, 세종이 즉위 훨씬 전부터 연구를 하고 있었다고 합시다. 30년 남짓한 시간동안 온 궁중에 있는 사람들이 한글을 비밀리에 사용하면서 개선했다고 하더라도 너무나 적은 그룹이고, 너무나 짧은 기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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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강욱
01.22 16:00
흠, 왕초보님의 말씀에 사실 논리적으로 공감이 더 가긴 합니다.
요즘 교과서에는 독자개발로 나온다고 합니다. 바뀐지 몇년정도 됐다고 하네요.. 얼마 전에 알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