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쪽팔리게 직장에서 꺼이 꺼이 울었습니다.
2010.06.19 01:44
남자가 말이죠. 눈물을 보이면 안되는데, 오늘은 아침부터 상사가 직장에서 부부싸움을 하기 시작해서 정말 참을 수 없겠더라고요. (교수 2명이서 같은 연구실을 쓰거든요.)
제가 듣는 거에 민감한 편인데 엄청 신경이 예민해 져서 그간 쌓여 놓은 울분을 참지 못하고 에스토니아 재단에 메일을 보내버렸습니다. "교수가 내 월급 보상금 (유럽 연봉 기준에 맞춰 줄려고 1년 연봉 정도를 한번에 덤으로 줍니다.)을 다양한 용도로 사용하라고 해서 내가 화가 나있다." 정말로 그렇게 들었습니다. "만약에 내가 여기서 이 포스터 닥터 연구원 자리를 그만둔다면 대학에 얼마를 보상하고 일을 그만둬야 하나요?" 이렇게 말이죠.
처음엔 제 처우개선을 위해서 뭔가 해줄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나라가 워낙 좁은 나머지 이게 직방으로 재단에서 대학으로 그 다음에 대학 사무실에서 우리 보스한테 전화가 왔습니다. 그 여자교수가 저를 불러서 전 아무 생각없이 그 문훵하니 열린 사무실로 들어갔죠. 그러니 정말 절 잡아 먹을 듯이 언성을 높히면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러다고요. 저보고 그만두고 나가고 싶으면 짐싸서 언능 나가라고요.
처음엔 무서워서 덜덜 떨다가 뭔가 말을 해야 할 것 같았습니다. 문제는 다른 7명 박사 과정생들이 문열린 바로 옆 공간에서 듣고 있어서 이런 논의하기에 적합하지 않았거든요. 남이 듣고 있으니 당당히 말도 못하겠고 교수는 그런거에 원래 신경안 쓰는 사람이라서 저를 몰아붙이고 그렇게 10분여간 시간이 지나다가 제가 꺼이꺼이 울기 시작했습니다.
정말 이 외딴 구 소련 나라에서 더러워서 못해먹겠지만, 어디 딱히 당장 갈 곳도 없고 말이죠. 어떻게 화를 가라 앉힌 다음에 내년 12월까지는 버텨서 여기서 일을 해야 할 것 같고 정말 억울하더라고요. 그렇게 1시간 동안 저는 울고 그 여자 교수는 남자애가 펑펑 우니까 불쌍해 보였는지 태도가 부드러워져서 혼자 외딴 나라에서 살기 힘드니 이해한다. 이런식으로 이야기가 흘러가서 1시간 뒤에는 잘 마무리 했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오전에만 그 시끄러운 공간에서 다른 9명이랑 보내다가 점심 때는 조용한 세미나실로 옮겨가서 제 도시락도 까먹고 혼자 조용히 보내는 걸로 합의 봤습니다.
교수가 그간 숨겨두었던 세미나실 여벌 키를 이제서야 꺼내서 보여주네요. 이제 세미나실 키 달라고 수위실 아줌마랑 손짓발짓하면서 말싸움 할 필요도 없어졌습니다. 오후가 되서 너무 배가 고파서 혼자 세미나실로 온 다음에 근처 수펴에 가서 빵을 사와서 먹었습니다.
좋은 레스토랑에 가면 맛나게 먹을 수 있지만 거리도 조금 되고 팁도 매번주는게 번거러워서 말이죠. 때로는 마음편하게 혼자 빵먹는게 좋거든요. 다른 동료들은 다들 자기들 끼리 먹으러 가거나 안 먹거나 그러니까 매번 물어보기도 무안한 게 발단되어 이제는 점심은 매번 굶거나 운좋게 혼자 앉아 있는 공간에 있으면 빵사먹거나 공원에 날씨 좋으면 혼자나가서 빵 사먹거나 그랬습니다. 물론 돈이랑 시간이 많으면 그 좋은 레스토랑에 가서 메뉴 설명 듣고 먹고 오고요. 그래서 울적거리며 빵을 우걱거리며 먹었습니다. 사온 우유는 또 생우유인줄 알았는데 sour milk를 잘못 사와서 치즈냄새가 진동을 했네요. 그래도 아까 일로 속도 쓰리니 먹어야 산다라는 생각에 거의 다 먹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지난주 핀란드 학회에서 만난 자상하게 보이는 영국인 할머니(라고 부르기엔 조금 젊은) 교수로부터 터키에서 메일이 왔는데요. 전임강사 자리를 줄테니 언능 자기가 있는 터키의 (가장 크다고 자랑하는) 국제 사립 대학교로 오라네요. 다음달 8일 이스탄불 경유로 한국에 휴가 들어 가는데 그때 이스탄불에서 수도인 앙카라까지 비행기표랑 숙박이랑 제공할테니 스톱오버해서 대학 들러서 구경하고 가라고 합니다. 일은 9월달부터 시작하고요. 아직 눈이 퉁퉁 부워서 글씨가 잘 안 보였지만 그렇게 메일이 온 것 같습니다. 가 봐서 제 마음에 드는 근무 환경이면 난생 처음으로 정규직 직장이 생길 것 같네요. 지난주에 같이 만난 마음씨 좋아 보이는 총장도 (그때는 안 믿었지만) 직접 저보고 오라고 했고요. 그래서 빵가루 묻은 입으로 여기 연구실 교수한테 벽너머로 썩소를 날려줬습니다.
코멘트 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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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산한박스
06.19 0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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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이제 고생 끝나는 가 싶네요. 다음달 터키의 그 대학에 초대받아 구경해보면 아마 마음에 들 것 같습니다. 지난달에 초대받아서 다녀온 친구인 핀란드 교수한테 좋다는 소리를 많이 들었거든요. 100% 영어로 수업을 하고 저에게 강의 경력을 쌓을 수 있게 도와준다고 플랜도 잘 짜 놓았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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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utbreaker
06.19 02:03
그래도, 또 다른 길이 열릴 수 있군요.
잘 될 거예요.
그런데. 식사는 .. 혼자하면, 정신이 쓸쓸해진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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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정규직 잡고 새 대학에 자리잡으면 여자친구한테 전화해서 결혼해야죠. ㅎㅎ 때마침 오랫만에 연락한 옛날 여자친구가 다음달 제가 이스탄불에서 돌아와서 한국에서 쉬고 있으면 3박4일로 놀러온다고 하네요. 아직 결정난 것은 없지만 천천히 이야기 해봐야 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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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강
06.19 02:08
힘내세요~! 멀리 타국에 계시는 분들 모두!!
다들 고생하시는 만큼 나중엔 꼭 빛을 보게 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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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친구만드는게 제일 힘들어요. ㅠ_ㅠ 이번 직장 잡고 (옛)여친이랑 이야기가 잘 되어서 가정을 꾸리면 나아지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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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초보
06.19 02:24
이런 글에는..
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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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하. 글의 본래 취지를 파악하셨군요. 그런데 오늘 정말로 희노애락이 교차되던 하루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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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초보
06.19 03:50
결론이 좋은게 좋은거죠.. 그럴땐 일을 막 벌려놓고.. 내가 절대적으로 필요할때 싹 발르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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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바닥이 워낙 좁은 지라 가능하면 잘 타협 보고 제가 가지고 올 수 있는 목돈이랑 맥북프로랑 연구 기자재들을 가지고 올 수 있나 없나 잘 이야기 해볼 생각입니다. 논문도 쓰는 중이라서요. 기기들이 필요하거든요. 잘 하면 터키랑 공동연구 하겠다고 말하고 몸은 터키에 있으면서 일을 계속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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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향살이가 쉽지 않지만 결국엔 봄이 오는군요. 축하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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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카라가 해발 고도 900 미터로 한국 사람이 살기에 적응 시간이 걸린다고 하네요. 봄이 따뜻하게 왔으면 좋겠어요. >_< 그래도 여기 보다는 좋을 것 같아요. 한인회도 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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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 좋은일 많이 있으시길 기원해 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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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이 타향 살이도 한국보다는 쉬울꺼다라고 항상 생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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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kim
06.19 06:02
토닥토닥.. 결국은 좋게 결론이 나는 것 같아 다행입니다. 빨리 자리도 잡고 결혼도 하고 애도 낳고 오손도손 사는 이야기 듣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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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minkim 님의 응원에 힘입어 여자친구랑 만나면 천천히 이야기 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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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머리아자씨
06.19 06:11
앞의 것은 잊고, 축하드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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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어제의 것은 잊고 또 그 교수랑 퇴직 정리하면서 협상할 일이 하나 있거든요.
대학에 보상해야 하는 금액을 정하는 과정에서 이미 50프로를 지불했으니까, 나머지 50프로를 더 지불하고 논문 한편을 만들어 내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 라고 타협을 해볼 생각입니다. 제가 터키로 가니 에스토니아 라는 국가에 많은 공헌을 할 수도 있을 꺼라고 말하면서요. 국제 협력이라는게 이렇게 편리한 단어인지 몰랐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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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길 -_-;; 어디서 흥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흥은 패스!
최후에는 벽없이 디렉틀리(?)한 썩소를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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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합니다.
정말이지 누가 보면 참 쪽 팔리는 상황이였습니다. 눈은 퉁퉁 부었고 입에는 빵가루 묻히고 정신나간 사람처럼 씰룩씰룩 웃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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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은 minki님인데 하며 읽었는데...닉을 바꾸셨군요.
결론은 좋은 뉴스. 미괄식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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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이 좋으면 다 좋은거라고 믿고 싶습니다. 이제 그 교수가 빽빽 거리며 소리치는 것 안 들어도 되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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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상로
06.19 08:43
窮卽通(막다른 길에서 문이 열린다)?
터키에서 새로운 생활이 기다리고 있겠군요. 뜻이 통하지 않는 사람을 많이 만났으니 터키에서는 좋은 사람을 많이 만날겁니다.
음식도 에스토니아 보다는 터키가 입맛에 맞지 싶네요. 이 기회에 배우자도 만나고 행복하시기를......
전 "흥" 안합니다. 밍키님이 행복하시기를 진심으로 바란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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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리플 감사드립니다. 지금 에스토니아 보스랑 잘 협상해서 다음 9월달 부터는 터키에서 살고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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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루타
06.19 10:26
뭐 남자가 울수도 있죠... 저도 전혀 상관없는 누군지도 모르는 상가집에 따라가서.. 그집 아이들이 친구들에게 말할때.
옆에서 괜히 울었네요... 뭐 그런거죠.. ^^
일단 축하해요.. ^^; 좋은곳 생겼으면 미련두지말고 이동하시고... 옛여친분 ^^; 이랑.. 잘 계획세우시길바래요..
외로운것이 가장 힘든부분이기도 하니까요... 정규직장 얻으신것 축하드리구요.. 이제 터기에 자리잡으시는건가요? ^^;
항상행복하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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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이스탄불 같지 않고 관광 도시도 아니니 도시 자체는 서울이랑 비슷할 것 같습니다. 대학 캠퍼스가 도시에서 약간 떨어져서 있으니 그안에 살면서 우선은 자리를 잡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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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이상한 사람들이군요..
그런데 미국으로 가 볼 생각은 안 하셨는지요? post-doc이라면 publish가 가장 큰 목적일텐데, 묘사하신 내용에 근거할 때 에스토니아 분위기는 학생들을 이용하는데 목적이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요. 교육학쪽 방법론은 미국쪽 publish가 제일 강하다고 들었거든요(minki님이 더 잘 아시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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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서도 항상 중등 학교에서 교사 경력을 요구하는데요. 박사과정중에 항상 대학에만 머물러 있어야 했어서 직접 가르쳐 볼 기회가 없었거든요. 그게 안되니 미국에도 지원하는게 힘들더라고요. 대신 이번 터키에서는 일주일에 이틀은 학교에서 직접 교사를 하라고 합니다. 대학은 모두 영어로만 수업을 하는데 학교는 어떨지 모르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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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저는 흥.. 할래요.
인증샷이 없으므로 무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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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증샷은.. 터키로 이사간다음에 올리겠습니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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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토
06.19 13:33
고생이 많으시네요. 다른 나라로 가시면 안되는건가요.. 다른 글들을 안 읽어봐서 이런 생각이 드네요.
에스토니아 탈린 근처 영화관이 있는 건물에서 일본식하고 한국식 이 섞여 있는 식당에서 밥먹은 기억이랑
슈퍼에서 너무 싸서 여행 내내 계속 사먹었던 체리가 생각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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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다른 나라에서도 연구비랑 자리가 있어야 움직일 수 있거든요. 근로 계약서가 없으면 근로 비자가 안나오고 그럼 외국에서는 3개월이상 체류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저 일터지고 나서 같은 날에 터키의 한 사립대에서 (아무) 정규직으로 오퍼가 들어와서요. 다음달에 대학 구경 오라고 비행기표도 준다는데, 가보고 결정할것 같습니다. 아마 안봐도 지금 상황에서는 꼭 가야하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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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7
06.19 13:39
gm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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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무슨 뜻이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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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 말리
06.19 19:15
예전부터 글써오신걸 봐왔는데요~
이제부터의 앞날은 밝을거란 느낌이 확옵니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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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이제 다른 직장 알아보는 것은 그만하고 맡은 일에 집중해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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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빠이야
06.19 20:26
포닥과 연구 교수 생활 10년 ..
그 또한 다 지나 갑디다.
Cheer u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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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원 감사드립니다.
제가 포닥생활 년수가 짧으니 100%는 아니겠지만, 충분히 공감합니다. 한국에서는 제 선배들이 저보고 돌아오지 말라고 했어요. 선배님들 취직 자리가 줄어든다고요. 대신에 전세계에서 절 필요로하는 곳은 어디든 달려가겠다고 생각을 넓게 바꾸었습니다.
위에서 울면서 빵먹은 거랑, 영하 25 겨울에 눈 1미터 쌓였는데, 욕심껏 맥주 사오다가 무거워 미끄러져서 허리다치고 그래서 돌아와서 혼자 누워서 술마시고 ㅠ_ㅠ 이런 기억들은 모두 추억이 되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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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리네머그잔
06.20 01:11
힘내세요 화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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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얼리네머그잔 님도 화이팅! 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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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niversary
06.20 01:50
글 읽어보면서 밍키님인글인거 같았는데 닉 바꾸셧네요ㅎㅎ;
힘내세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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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앞으로도 글 자주 올릴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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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지에서 고생하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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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내십시오! 화이팅!
토닥토닥. 고생이 많으십니다.
힘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