징기스칸이 한국사람이라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2011.11.29 10:29
아래 대머리아짜씨님 글에 댓글 달려다 따로 글 올립니다.
징기스칸이 한국사람이라는 얘기를 들은건 한 서너달쯤 되었네요.
그때 정말 술이 확깰 정도로 충격적이었는데요.
낭구 게스트하우스를 오픈하기전에 연해주지방에 계시는 몇몇분들과 축하연을 하고 있었는데
오랫동안 고려인을 도우는 단체에 계시는 한분이 그애기를 하더군요.
징기스칸이 한국 해남에서 건너온 사람이라고 합니다.
이쪽 연해주지방에서는 꽤나 알려진 얘기라는데....놀랍기만하네요.
원래 몽골사람들의 기질이 남을 지배할 정도로 드센 사람들이 아니라고 하는데
징기스칸은 어릴때부터 싸움을 아주 잘했다고 합니다.
해남사람들이 좀 드센가?
칸은 한민족을 얘기하는거라 말하는것이고,
그리고 싸움을 징그럽게 잘한다해서 붙여진 이름이 징기스칸이라더군요.
이 얘기를 듣고 좀 웃었는데 여튼 세계를 지배한 영웅이 한국사람이니까 기분은 좋더군요.
술자리에서 나온얘기라서 처음에는 그냥 하는소리겠지....하다가 하도 궁금해서 몇번 이분과
같이 잠을 자면서 물어봤는데 허튼소리 하실분은 아니고, 또 역사학자 교수님도 꽤 근거있는 얘기라고 하시더군요.
사실이었으면 좋겠습니다.
발해성터가 아직도 잘 보존되고 있고, 거기에 엄청난 유물을 현재 한 독지가분이 소장하고 계신데
혹시 거기에서 어떤 단서가 나올지도 모르겠습니다.
발해성으로 들어가는 물길입니다.
발해성터입니다.
코멘트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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閒良낭구선생
11.29 12:33
동유럽까지....그렇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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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발이
11.29 10:53
재미있는 이론이네요.. 징기스칸 일본인 설도 있었더랬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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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거 라는게 아마
징기스칸의 과거가 불분명 하다는점들
등등 여러 얘기가 있는걸로 압니다만...
주로 그걸 이용해 먹은 이들이 일본 이었습니다.
일본의 유명한 이야기인 벤케이의 1000번째 칼 이야기에 등장하는
미나모토 요시쓰네가 몽고로 건너가 징기스칸이 되었다 라는 이야기 이죠
소설,영화,만화...
엄청나게 많습니다.
설마 한국에서도 징기스칸 한국인설이 있는줄은 몰랐군요
환빠들이 하는 이야기와도 비슷하게 들리기도 합니다만...
조금은 조심스럽게 해야될 이야기가 아닌가 싶기도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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閒良낭구선생
11.29 12:34
일본도 써먹었군요.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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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하늘
11.29 10:55
재미있습니다.. 나중에 더 관심을 가져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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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왕~재미있습니다.
현지 사진 많이 올려 주세요~
놀러가구 싶다... ㅡㅜ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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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기스칸의 경우 일본인 혹은 한국인이라는 설은 가차없이 무시되도 좋은 설입니다. 워낙 출생과 성장에 대한 기록이 명확하기 때문에 다른 나라사람이다라는 이론이 끼어들 틈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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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강욱
11.29 11:32
오옷...한 방에 정리 !!!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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閒良낭구선생
11.29 12:35
아흑~ 한방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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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kim
11.29 11:21
잘 지내시죠? 사업은 잘 되시길 기원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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閒良낭구선생
11.29 12:35
오랜만입니다.^^
언제 오시면 얼굴 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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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니
11.29 11:33
징기스칸은 고려사람이라고 하기에는 문제가 많은 것 같네요. 네이버 지식..에서 찾은 건데.. 이것 아니라도 테무친에 관한 한은 많은 정서들이 있어서 이론이 없습니다.
스스로 동이족이라 밝힌 금나라시조나 고구려 수복을 기치로 들고 일어난 요나라 시조의 경우에는 이론이 있을 수 있지만 징기스칸은.. 좀...
이하는 네이버에서 끍어온 겁니다.
1162년경 오늘날의 몽골과 시베리아 지역이 맞닿은 곳 근처, 오논 강 유역 숲에서 보르지긴 씨족 예수게이와 올크누트 부족 출신 후엘룬 사이에 아들이 태어났다. 후엘룬은 메르키트 부족 전사의 아내였으나 예수게이에게 납치당한 처지였다. 예수게이는 이미 첫 부인 소치겔과의 사이에 아들 벡테르를 두고 있었다. 새로 태어난 아이의 이름은 테무진(鐵木眞). 예수게이가 죽인 타타르족 전사의 이름이었다. 예수게이는 테무진을 부르테와 약혼시키고 돌아오는 길에 타타르족 야영지를 방문했다가 독살당하고 말았다. 두 아내와 10살이 안 된 자식 일곱 명이 남겨졌다. 12세기 당시 초원 지대에는 수십 개 부족과 씨족들이 전투, 사냥, 유목, 약탈, 납치, 교역 등으로 생존을 이어가고 있었다.
이하는 생략...
부모 조부모 까지 이름이나 부족이 다 알려져 있고 이는 다른 이론이 있을 수 없습니다. 약탈혼이니 장자라면 다른 사람의 아들일 수도 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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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니
11.29 11:37
몽고의 시조가 고리족의 여인을 맞아서 가정을 이루었다는 전설이 있어서 몽고는 고려를 타민족으로 취급하지 않았고 이것은 몽고의 세계정벌에서도 나타나서 고려를 부마국으로 받아들이고 승계권도 인정하였지만 이것과 테무친의 가계와는 별도의 문제가 아닌가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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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니
11.29 11:47
발해관련 이야기라면 완안 아골타나 아이신지로 누르하치에 관한 이야기가 와전된 것이 아닐까요?
완안아골타는 스스로도 신라인의 후예라는 말을 남겼으니 이건 가능할 것도 같은데요..
완안씨는 모성승계하는 여진의 전통에서 왔고 부성은 김(금)씨라고 해서 나라 이름을 금으로 세웠다라고 하는 말이 있지요.
누르하치의 경우는 선대가 다 밝혀져 있고 건주여진이 주장하는 금나라의 방계여서 선대가 비슷한 주장을 한 경우도 생각할 수 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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閒良낭구선생
11.29 12:36
댓글 잘 읽었습니다.
흥미진진하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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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족의 한 갈래인 키야트 보르지긴 씨족의 부족장 예수게이의 아들로 태어났다. 태어난 날에 아버지 예수게이가 죽인 타타르족 장수의 이름이었던 '테무진'에서 이름을 따와서 이름을 테무진이라 하였다.
그러나, 아버지 예수게이가 적 부족장들에게 독살당하는 사건이 일어난 이후로 테무진에게 엄청난 시력이 닥쳐왔다. 아버지가 죽은 이후에 가문이 완전히 망해버렸고, 친척들과 부족 사람들도 모두 테무진과 그 가족들을 버리고 떠나버렸다. 남은 부족 인원이라곤 자신과 어머니, 형제들을 포함해서 고작 9명이 전부였다.
...
테무진은 힘을 합쳐 메르키트를 무찌른 후에 잠시동한 자무카의 세력과 합류하였으나 곧 결별하였다. 이후에 자신을 지지하는 부족들에 의하여 몽골의 칸으로 추대되었으며, 이후부터 '칭기즈 칸'이라 불리게 되었다. 또한 그동안 자신을 따라준 장수들과 부하들, 그리고 형제들에게 관직을 나누어 주는 등 논공행상을 하였다.
일단 1차 사료가 원조비사로 원나라 역사서 (자기민족후빨)인 걸 감안하고 이게 실제로 맞는 건지는 교수들이 알아서 할 일이죠.
요런 것도 있네요;;
칭기즈 칸은 어렸을 때 배신한 혈족때문에 고생한 기억 덕분에 일생에 걸쳐 가문이나 혈족보다도 스스로 얻은 '인맥'을 믿은 편이었다. 그가 젊었을 적 친척이라는 사람들은 그를 자주 배신하곤 했지만 혈연 없이 맺어진 관계는 끈끈했고 이 때문에 가족보단 다른 사람을 더 믿는 때도 있었다.
심지어 함께 고생했던 친동생 카사르조차 반란에 가까운 움직임을 보여서 견제했던 적이 있을 정도. 반면 테무친에 의해 친형 벨테르가 살해되었던 이복동생 베르구타이는 단 한번도 불온하게 움직인 적이 없었기에 신뢰받았다. 밑바닥까지 떨어져 고생했던 경험에서 나온 건진 몰라도 칭기즈 칸은 Give & Take 이상의 충성을 부하들에게 요구한 적이 없었다. 전황이 불리하면 도망쳐라가 몽골제국의 정식 군율중 하나였을 정도. 그러나 오히려 그 때문에 부하들로부터 절대적인 충성을 받았으며(오늘날엔 별것 아닌 것 같아 보여도 그 당시까지 초원은 우두머리가 모든 걸 갖는 독식체제로 군주들 중 칭기즈 칸처럼 Give & Take의 원칙을 따른 사람은 없었다) 그 부하들 중에서 배신자는 단 한사람도 없었다. 칭기즈 칸의 부하중 한 사람이 남긴 기록 曰 "그가 물을 가르키면 물에 뛰어들고, 불을 가르키면 불에 뛰어들었다."
칭기즈칸이 죽인 사람들 덕분에 탄소배출량이 7억톤이나 줄어들어서 지구온난화 방지에 기여했다.
몽골족의 풍습을 죽을때까지 따랐고 사치를 싫어했다. 자신을 높이는 형용사마저도 싫어하여 황족은 그를 테무진이라 불렀으며 공문서에도 그의 이름 앞에 다른 명칭이 붙는 것을 싫어했다. 각종 종교에 대해서도 관용적인 태도를 보였지만, 이 때문에 몽골의 풍습이 침식되는 것은 절대 바라지 않았다. 그의 후손으로 몽골의 중국화를 가속시킨 쿠빌라이칸과는 정 반대의 태도이다.
칭기즈 칸 본인은 자신의 능력이 뛰어나서 승리한 것이 아니라 적들이 사치스럽고 불경하여 승리한 것이라고 얘기했고 본인은 사치를 싫어한다고 얘기했다. 그의 백성은 자식처럼, 능력있는 자는 출신을 불문하고 형제처럼 대했다고 얘기했으며 그의 장군들과는 끈끈한 우애로 이어져 있다고 얘기했다.
칭기즈 칸 본인은 고문을 법적으로 금지하고 죽일 거면 그냥 죽이고, 살릴거라면 그냥 살렸다. 하지만 죽일땐 엄청 죽이지만 이유없이 죽이지는 않았다. 자무카를 잡았을때도 자무카가 자신을 죽여달라고 하자 이유없이 그를 죽일수 없다고 해서 먼 과거에 있었던 일을 죄명으로 하고 죽였다. 선전포고없이 쳐들어간 적도 없다.
자신의 명령을 어기는 자는 그 누구도 용서치 않았다. 아들들이 자신의 말을 안듣고 싸웠을땐 엄청 화가 나 있다가 볼츠의 중재로 설교로 끝났지만, 항복한 도시는 약탈하지 말라는 그의 명령을 어긴 칭기즈 칸의 사위는 즉시 일반병으로 강등되어 싸우다 죽었다. 이 덕분인지 페르시아의 역사서에서도 '칭기즈 칸 그 자식 재수없긴 한데 나름대로 공평한 면은 있었다'라고 기록한다.러시아를 240년간이나 지배해온 탓인지 냉전 당시엔 몽골사람들은 칭기즈칸을 입에 올릴 수 없었다.가장 많이 죽어나간 서아시아에선 아직도 칭기즈칸 이야기를 하면 멱살을 잡힌다.환빠는 당연히 한국계라고 우긴다. 그러니 몽골이 먹었던 땅은 우리꺼중국은 중국인이라고 우긴다. 그러니 몽골이 먹었던 땅은 우리꺼일본은 미나모토노 요시츠네라고 억지사료로 우긴다. 일제시대때 만들어진 이론이다.유럽사람들은 튀르크계의 혼혈인 백인이라고 주장한다. 물론 몽골인들은 황인종이었지만 같은 유목민족인 튀르크계의 터키인들에겐 대우가 괜찮았다.연구결과에 따르면 아시아의 약 8%(전 세계의 0.5%)의 남성 인구는 같은 Y 염색체를 가지고 있다고 하며, 몽골 남성의 40퍼센트를 포함하여 아시아에서 그로부터 Y 염색체를 물려받은 남성은 대략 1600만명에 이른다. 하지만 한국과 일본은 전혀 없는데, 칭기즈칸이 이쪽으로 온 적 없기 때문. 여몽전쟁은 그의 후손대에서 발발했다.
칭기즈칸의 무덤은 어디에 있는지 아무도 모르는데, 매장하는 과정에서 이를 본 사람은 모조리 죽였기 때문. 매장 후 기병대로 평지로 만들어버렸다. 그리고 무덤을 다진 기병대도 전부 몰살시켰다. 이 때문에 일제가 무덤을 찾으려고 용을 썼지만 실패했다.일본침략전쟁에 쓰기 위해 훗카이도에 양을 풀어서 키웠는데 일본인으로선 처음보는 동물이었다. 양털을 얻기 위한 종류라 고기에 노린내가 심해 인기가 없었는데, 어떻게든 잘 요리하기 위해 만든 것이 칭기즈칸이라는 냄비요리. 그래서 일본에선 양하면 몽골이고 칭기즈칸이다. 일부에선 요시츠네 요리라고도 부른다. -
해색주
11.29 13:58
뭐 이건 징기즈칸이 자기네 나라 사람이라고 우기는 일본인과 다를바 없는 견강부회라고 생각을 합니다.
-_-;;
한국인이 몽골계인건 잘 알려진 사실이죠.
고려시절엔 원나라에 발리기도 했잖아요.
몽골계의 피가 조금이라도 흘러간 나라들까지 따지면 동유럽까지도 포함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