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게시판


숲의 오두막.

2010.04.11 07:00

명상로 조회:881

 

앞에는 작은 잔디 정원이 있고 온통 푸른 숲으로 둘러쌓인 목조 오두막에서 살고 싶습니다.  벽면 한 쪽은 집안이 다 들여다 보일 정도로 큰 창을 열고 바람이 거실 바닥의 잊혀진 먼지를 불러 일으켜 커텐의 퇴색한 무늬도 보게 하고 흔들의자에 앉아 휴식을 즐기게 하는 것도 좋겠지요.


가구와 집기는 적을수록 좋습니다.  책상과 의자,  밖을 바라보며 커피를 마시는 흔들의자.  몇 권의 책.  건반이 누렇게 변색한 피아노가 있다면 때론 위안이 되겠지요.  나는 피아노를 치지 못하지만 피아노가 내 의식 속에 들어와 자리를 잡는다면 몇년이 걸리드라도 월광곡 1악장 쯤은 능숙하게 칠 수 있도록 연습에 몰두할 것입니다.  내가 그 음악을 연주할 때, 내게도 영혼이 있고 그것을 볼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 깊은 지옥과 혼돈과 절망과 방황과 짧은 환희와 후랑켄슈타인과 짐승의 눈빛과 태여날 때 부터 죄의식으로 괴로워한 참회의 눈물을 볼 것입니다.


새벽에는 이슬에 충분히 젖을만한 베이지색 긴 바지와 바다물빛 셔츠를 입고 시간에서 벗어난 산책로를 따라 햇볕에 이마가 뜨거워 질 때까지 먼 길을 걸을 것입니다.  세상의 이치에서 멀리 떨어진 나는 자유롭습니다.  희미한 여명 속으로 갓 태여난 하루살이와 손톱보다 작은 나방의 무리가 내 얼굴을 스치며 바쁘게 또는 한가롭게 날아 갑니다.  이 비행이 생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행위일지라도 산다는 것은 이다지도 엄숙합니다.


숲은 지혜롭고 어리숙합니다.  나그네의 발길에 꽃을 짓밟히게 해서 심사를 혼란시키고 때로는 시원한 바람을 일으켜 뜨거운 이마를 식혀 주기도 합니다.  이 꾸불꾸불한 길에서는 아무 것도 예정된 것이 없습니다.  머무르거나 떠나거나 얼룩무늬 도요새를 만나거나 너무 높은 곳에 있는 벌집을 털지못한 불곰에게 잡혀 도리질을 당하드라도 숲의 배려는 아니지요.  여기에서는 애초에 선악의 경계가 없습니다.


숲의 어디쯤은 분명히 진공상태입니다.  공기가 회오리를 일으키며 빨려 들어가면서 저항의 노래소리를 만듭니다.  마왕의 변주곡이고 이졸데의 애가이기도 합니다.  거대한 통나무가 하늘끝에서 가녀린 줄기가 되듯이 그 노래의 끝은 쓸쓸합니다.  듣고 있으면 가슴이 저리지요.  숲에서 두려울 만큼 가슴이 저린 기억은 누구나 있을 것입니다,


길을 돌고 돌아  저 멀리 낮고 푸른 언덕아래에 오두막집이 있다면 그 집에 머무는 사람은 나그네입니다.  오두막의 주인이건 혹은 손님이건 나그네이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나그네임을 깨닫지 못한다면 그 사람의 생은 불행합니다.  그가 가진 모든 것을 부둥켜 안고 죽음에 직면하게 되겠지요.  나그네가 아니라면 사랑조차 불행한 것입니다.  눈에 보여야 마음이 놓이는 사랑은 항상 더 많은 것을 바라고 갈증 때문에 눈이 멀게 됩니다.  사랑하는 만큼 버릴 수도 있을 때,  여기 이 숲으로 들어올 수 있습니다.


이윽고 언덕과 삼나무와 이슬이 맺혀 반짝이든 거미줄 마져 어둠에 잠기면 가장 높은 바위에 올라 별똥(가장 아름다운 것과 더러운 것을 절묘하게 조합한 언어의 놀라움!)이 사라지는 찬란한 모습을 지켜볼 것입니다.  다소 귀찮기는 하지만 이것은 나그네의 의무입니다.


이제는 꿈에서도 푸른 숲이 보입니다.  그만큼 내 짐이 무거운 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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